¶글쓴이 : 한정석
-이승만이 6.25때 ‘서울 안전하니 생업에 종사하라’ 방송하고 탈출. 한강교 폭파시켰다?
-무초 대사 불러 ‘내가 북한군 포로가 되면 한국 정부는 항복할 수밖에 없다’ 메시지 전달
-미국의 신속하고 대량적인 무기 지원과 참전의 강도 높이기 위한 이승만의 외교적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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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이승만 대통령이 6.25때 ‘서울은 안전하니 생업에 종사하라’고 방송하고는 본인은 서울을 버리고 부산으로 탈출했으며, 이 과정에서 한강교를 끊었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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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건 100% 날조인데, 심지어 이승만에 대해 연구했다는 이들도 이 문제에 적지 않은 오류를 범하는 것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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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승만은 6.25가 발발한 당일 밤 10시에 대전으로 정부 이전을 결심하고 무초 주한 미국대사에게 통보했다. 이 사실은 미 대사관 기록에 분명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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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당일 밤 대전 이동을 결심한 것은 100% 외교적 전술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데, 그날 아침 무초 대사와 대화에서 이승만은 미국의 신속한 탄약과 무기 지원을 요청했지만, 무초 대사는 ‘지금으로서는 미군의 지원 없이도 한국군이 잘 버티고 있다’라고 대답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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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6.25 당일 오후에는 북한의 YAK전투기가 김포 비행장과 용산역을 폭격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무초 대사를 밤 10시에 다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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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다리는 6월 28일 새벽에 이승만의 의사를 묻지 않고 채병덕 장군의 결정으로 폭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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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무초 대사와 마주한 그 자리에서 ‘만일 내가 북한군에 포로가 된다면 한국과 미국은 대단히 불행한 상황을 맞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말에 가장 크게 놀란 이는 배석한 신성모 국무총리였다. 이승만의 이 말은 ‘내가 북한군의 포로가 되면 한국 정부는 항복할 수 밖에 없다’는 메시지였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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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승만은 자신이 체포되면 전쟁을 종식시켜서 국민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는 의지였던 것 같다. 그렇게 되면 미국으로서는 이만저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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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이어서 ‘이를 위해 대전으로 정부 인사들과 내려 가겠다. 이는 나의 탈출이 아니라, 정부를 옮기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6.25 당일 밤 10시 상황이었다. 이에 무초 대사가 한국군은 서울을 사수해야 한다며 크게 반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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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 저는 서울에 남겠다. 남아서 미국 시민들을 피난시키겠다’고 맞섰다. 그러자 이승만은 ‘그렇게 하시라’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진작 미국이 F51 등, 한국에 무기 지원을 신속하게 해야 한다고 그렇게 말했건만 들어주지 않다가 이 지경이 된거다. 나도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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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북한군에게 잡힐 경우, 항복할 수 있는 가능성과 이를 피해 대통령이 대전으로 내려간다면 미 대사 무초로서는 서울에 남은 미국 시민들의 피난과 안전 문제를 자기 혼자 다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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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초 대사는 이승만과 면담 후 신성모 총리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고 신성모 총리는 ‘나하고도 의논한 바가 없어 나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무초로서는 걱정이 이만 저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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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다음날인 6월26일, 새벽 4시에 무초 대사에게 ‘지금 당장이라도 미국의 F51 폭격기와 비주카포, 36문의 105mm곡사포, 75mm 대전차포 등의 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재촉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기가 막힌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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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직접 맥아더와 통화하려 했는데 통화가 안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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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초는 다급하게 본국에 연락했고 맥아더는 당일, 한국인 전투기 조종사10명을 수원에서 일본으로 실어나른 후, 1시간 정도 F51기 훈련을 시킨 후 이 전투기들을 몰고 서울로 돌려보냈다. 그 밖에 본격적인 무기 공수 지원이 이뤄졌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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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6월 27일 새벽 4시, 이승만은 신성모 총리와 주변 정부인사들의 권유에 의해 대전으로 이동하게 된다. 한강 다리는 그 다음 날인 28일 새벽에 이승만의 의사를 묻지 않고 채병덕 장군의 결정으로 폭파됐다. 이승만은 이 결정을 강도높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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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 있던 이승만 대통령이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게 된 것은 미국 대사와 공사의 권유였다. 이승만은 차라리 대전에서 죽겠다고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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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이승만의 부산 피난을 권고한 것은 맥아더가 수원에서 시찰 중 북한의 공습을 받은 바, 대전도 함락이 불가피하다고 본 것이고, 만일 이승만이 북한군에 잡히면 한국은 전쟁을 포기할 거라는 이승만의 배짱이 우려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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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서울 탈출은 미국에게 자신이 포로로 잡히면 전쟁은 끝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경고하며, 미국의 신속하고 대량적인 무기 지원과 참전의 강도를 높이기 위한 외교적 행위였다는 점을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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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미대사관 기록 , ‘전쟁 지도자로서 이승만/ 온창일’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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