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소년병(7) 사창리 후퇴와 표창장

<<광고>>



¶글쓴이 : 길도형

 

-6사단 연대별로 장병들을 집합시켜 씨름과 기마전완전군장 단축마라톤 등 체육대회 진행

-중공군 포위로 다목리고개, 지촌천 하류 방면에서 요란한 따콩’ 소리. 폭발음과 화염 뒤덮여

-계급 없는 군복 1년여 만에 맛본 체육대회의 즐거웠던 기억과 사단장 표창장에 대한 아쉬움

 

 

자료 조사와 집필의 형편상 이 연재는 1950년 개전 초기의 기록에서 1951년 4월 사창리 퇴각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그 도중에 진행됐던 낙동강, 초산 전투 등을 향후 추가해서 게재할 예정입니다. <편집자>

 

장도영 사단장이 지휘하는 국군 제6사단은 중공군의 춘계공세가 예고된 가운데 1951년 4월 하순으로 접어들 무렵 화천 사창리에 주둔하며 적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22, 6사단은 전장의 긴장감으로 인한 피로를 잠시 잊고장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망중한의 조촐한 체육대회를 개최했다각 연대별로 할당 선발된 장병들을 공터로 집합케 하여 씨름과 기마전완전군장 단축마라톤 대회가 순차적으로 진행됐다.

 

소년은 7연대를 대표하는 단축마라톤 선수들 가운데 한 명으로 선발됐다기마전은 옛 시골 동네에서의 투석전을 연상케 할 만큼 거칠었다병사들은 신고 있던 양말을 벗어 모래며 자잘한 돌멩이들을 절반쯤 채워 감추고 있다가 기수 노릇을 하고 있는 간부들을 집중 공격했다

 

적당히 힘겨루기를 하며 대치할 때쯤 계급을 내세운 상대 기수가 주먹을 휘두르면 기다렸다는 듯이 양말 모래주머니를 휘둘러 그를 태우고 있는 병사들을 쓰러뜨렸다말들이 쓰러지니 기수 노릇을 하던 간부들도 속절없이 나가떨어졌다비록 코피가 터지고 얼굴이 멍들고 머리에서도 피가 흘렀지만기마전에 참여한 장병들이나 구경하는 장병들이나 폭소를 터뜨리며 모처럼 가져 보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완전군장에 소총을 멘 채 달리는 단축마라톤. 18세 소년은 좁은 분지를 에두른 시골길을 몇 바퀴 달리는 동안 줄곧 1등을 놓치지 않았다소년에게는 사단장(장도영표창장이 수여됐다그러나 표창장은 소년에게서 오래 머물지 못했다.

 

사창리 후퇴에서 중공군에 포위된 국군은 각종 야포와 개인화기, 군장을 비롯한 장구들까지 팽개친 채 후방 가평 방면으로퇴각했다.

 

4월 하순의 땅거미가 지고 어둑해질 무렵북쪽 다목리고개와 동쪽 지촌천 하류 방면에서 요란한 따콩’ 소리가 들려 왔다포탄 폭발음과 화염이 임시로 차려진 진영을 뒤덮기 시작했다그와 동시에 사창리 분지를 감싼 능선들에서는 꽹과리며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다. 6사단 전체가 사창리 비좁은 분지에 갇힌 채 중공군에게 포위된 것이다.

 

장도영 사단장은 미군 등에서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중공군의 춘계공세가 있을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다그에 따라 사단 전체 병력을 사창리에 집결시켜 적이 춘천과 가평으로 진출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작전을 짜고 있었다그런 중에 가진 체육대회와 전장에서의 조촐한 회식으로 조금은 느슨해진 장병들은 각자의 군영으로 돌아가 일찌감치 휴식을 취했다그러나 휴식을 깨는 요란한 따발총 소리와 혼을 빼는 나팔소리에 병사들은 물론이고 지휘관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할 장교들까지 군장에 개인화기까지 팽개치고 사창리 분지의 남쪽 골짜기를 향해 달음질치기 시작했다.

 

장도영 사단장은 다급하게 각 부대별 현 위치 사수를 명령했다그러나 회식과 휴식 중에 기습을 당한 장병들은 각종 화포며 개인 장비들을 내팽개친 채 퇴로를 찾아 내달렸다장병들은 그 순간 압록강 초산까지 진격했다 온정리 계곡에서 중공군에 포위된 채 궤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며 수많은 전우를 잃어야 했던 악몽에 사로잡혔다(당시 초산까지 진격했던 7연대는 중공군의 포위 공격을 받아 군우리로 탈출 재집결했을 때 3,553명의 병력 가운데 75%를 잃어야 했다군우리로 재집결한 생존 병력 수는 불과 875명으로 연대 전투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한다).

 

각종 야포와 개인화기군장을 비롯한 장구들까지 팽개친 채 무질서하게 남쪽 후방 가평 방면으로 내달리는 장면을 戰史와 사전류에서는 철수라고 표기하고 있다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퇴각이고 패주였다그렇게 4월 22중공군 제9병단 소속 3개 사단의 기습으로 시작된 사창리전투는 19연대는 고립, 2연대와 7연대는 차량과 야포 등의 장비를 포기하고 일부는 좌우 인접 부대로일부는 적의 포위망을 뚫고 흩어져 철수해야 했던 6사단의 완벽한 패배였다.

 

6사단 주력이 화악산과 명지산 사이 고개와 골짜기를 따라 퇴각하며 부대를 수습미군 포병의 지원 하에 23일 중공군을 저지하려 했으나 이미 전투의 주도권은 중공군이 쥐고 있었다변변히 싸워 보지도 못하고 다시 퇴각한 끝에 24일 지금의 가평 북면에서 영연방 제27여단의 엄호 분전 덕분에 가까스로 부대를 수습할 수 있었다미군 헌병들이 최루가스를 뿌리고 권총으로 위협사격을 가하며 막아섰지만전의를 상실한 병사들의 탈주를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25일 가평읍 부근까지 내려온 6사단은 지촌천을 따라 밀고 올라오는 중공군을 뚫고 화천천 하류로 퇴각한 포병 부대원들이 춘천을 거쳐 가평 본대로 합류하면서 원형을 회복할 수 있었다당시 국군 제6사단이 사창리 패전으로 입은 무기와 장비 손실을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부득이 사단은 다시 가평 계곡을 향해 철수하여 영연방 제27여단의 엄호하에 24일 아침 가평 남서쪽에서 부대를 재편하였다이때까지 사단은 소총 2,263자동화기 168, 2.36인치 로켓포 66대전차포 2박격포 42곡사포 13그리고 차량 87대의 손실을 입었다사단을 화력 지원한 미 포병부대도 105밀리 곡사포 15문을 비롯하여, 4.2인치 박격포 13문과 242대의 무전기그리고 차량 73대의 손실을 입었다그러나 다행히 낙오한 병력들이 계속 부대로 복귀하여 4월 25일에는 6,313명이 집결하게 되었다.’

 

당시 수준으로 6사단이 입은 무기와 장비 손실만 해도 사단이 해체되어야 할 상황이었다그러나 중공군의 기습과 함께 개인화기조차 챙기지 못하고 후퇴한 덕분에 국군 제6사단은 역설적이게도 병력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22일 저녁 무렵 시작된 사창리전투는 영연방 제27사단과 미 제2사단40사단213야전포병대대원들의 분전에 힘입어 25일 중공군 주력이 수많은 사상자를 내거나 포로가 된 가운데 퇴각하면서 종료됐다.

 

소총과 군장을 챙길 틈도 없이 남쪽 계곡과 고갯길을 내달려온 소년은 23일 날이 밝아서야 미군으로부터 개인화기와 장비들을 지급받을 수 있었다그러나 소년에게는 계급 없는 군복을 입은 지 1년여 만에 전장에서 맛본 체육대회의 즐거웠던 시간과 꿈결처럼 사라진 사단장 표창장에 대한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장도영 사단장 명의名義로 된 표창장은 학교 문턱을 들어서 본 적 없는 소년이 난생 처음 받아 보는 상이었다.

 

<대한민국 소년병 연재 리스트>

(1) 부랑아에서 하우스보이로 (2) 춘천전투 포화 속으로
(3) “너는 지금부터 진짜 군인” (4) 새 M1소총과 철모, 탄띠
(5) 쓰러지는 적병들을 보며 (6) 이젠 꼬마 아닌 우리 전우

 

<<광고>>



No comments
LIST

    댓글은 닫혔습니다.

위로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