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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영일 전 국회의원
-동유럽 7개국의 역사나 지구 최빈국 신세인 북한 현실에 비추어 이승만의 선택은 현명
-4.19 세대는 5.16을 반동으로 보았지만, 일반인들의 태도나 시각은 그들과 많이 달라
-발전론적 시각에서 보면, 4.19와 5.16 모두 국민 여망의 실현이라는 점에서 상호보완
가. 이승만 리더십의 한계와 기여
이승만에 대한 필자의 생각에 영향을 미친 부분은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그분의 과오가 아니라 일반인들이 흔히 놓치기 쉬운 그의 공헌 때문이다. 1945년부터 1948년 당시 이승만에게 주어진 여건을 보면 대내외적으로 대한민국을 민주국가로 발전시킬 여건이 태부족한 상태였다.
지정학적으로 한국의 북방에는 소련과 중국이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대국이었지만 당시 중·소 양국은 한국의 국가적 독립에 필요한 경제원조를 제공할 여력이 없었다. 당시 소련은 동유렵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점령한 북한지역을 그들의 위성 정권으로 만들고 뒤이어 한반도 전역을 자기의 영향권 하에 두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소련의 입장에 맞서 유엔감시 하의 자유 총선거를 통해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독립국가 건설의 길을 선택했다. 이승만의 선택은 1990년대에 소련의 위성국 지위를 벗어난 동유럽 7개국의 역사와 오늘날까지도 지구 최빈국 신세를 면치 못하는 북한의 현실에 비추어 현명한 것이었다.
또 당시 국내상황을 보면 문맹률은 전체인구의 87%였으며 인구의 70%를 점하는 농민들은 대개가 소작(小作)농이었다. 국민들의 정치의식수준도 서방적 오리엔테이션을 가진 소수 계층(3%설이 많음)을 제외하고는 전 민주주의(前民主主義) 시대의 정치문화유산을 탈각하지 못한 상태였다.
국가건설에 필요한 경제력도 취약했다. 이승만은 정부 수립과 동시에 문맹퇴치사업을 펼치면서 재정이 빈약한데도 ‘배워야 산다’면서 초등교육의 의무화를 추진했다. 또 농지개혁에 착수하여 정부 수립 3년 만에 소작농체제를 자작농체제로 전환시켰다. 양반(兩班)계급만이 재산과 지식을 가질 수 있었던 조선 시대의 유산을 일거에 청산한 것이다.
아울러 6.25 전쟁을 겪으면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경제원조를 확보, 전 국민을 자유민주국가인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正體性)을 갖게 했다. 이 결과 4.19가 일어날 당시 한국국민들의 문자 해득률은 80%대로 올라섰다.
•자유민주국가의 국민이라기보다는 반공 국가의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지만 어떻든 국민적 정체성을 확립시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85세의 극노인(極老人)으로서 이기붕((李起鵬) 국회의장을 안전한 후계자로 새우려다가 국민적 저항에 봉착했다. Vilfred Pareto가 엘리트 순환론에서 말하는 육체적 몰락이 정치몰락을 부른 것이다. 이러한 상황까지를 감안할 때 이승만은 한국을 ‘전 민주주의 시대에서 민주주의 시대’로 이행시키는 과도기의 리더로 위치 매김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부정선거로 권좌에서 물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한국을 민주국가로 발전시킬 토대를 쌓는 데 기여한 그분의 공헌은 그것대로 평가되고 기억되어야 할 것 같다.
나. 국민적 열망을 수렴한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
대부분의 4.19 세대들은 5.16 군사쿠데타를 4.19 체제에 대한 반동으로 보았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가 진행되는 과정에 나타난 일반인들의 쿠데타를 보는 태도는 4.19세대들과는 달랐다.

대한상이용사회 회원들이 5.16쿠데타를 지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1960년 4월의 거리에서 대학생 시위대를 열렬히 성원했던 바로 그 시민들이 그때로부터 1년 조금 지난 시점에서 쿠데타로 민주당 정부를 몰아내고 집권한 군부 세력들에게 결코 등을 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올 것이 왔다”는 식의 공감대가 확산되었다.
국민들의 태도 변화는 4.19 혁명으로 집권한 민주당 정부가 새 정부에 걸었던 국민적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탓이다. 국민들은 자유와 인권도 중요하지만 더욱 급하고 절실했던 것은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요컨대 민주적 권리실현과 더불어 빈곤으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집권 민주당은 민생고를 전혀 풀지도 못하고 극도의 혼란과 무질서마저 바로 잡지 못했다.
바로 이때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시국 혼란을 강압적으로 수습할 명분으로 반공을 국시(國是)를 내세우고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헤매는 민생고 해결을 공약했다. 시쳇말로 정치적 가치의 중립개념인 조국 근대화, 빈곤 탈피를 약속했다. 박정희는 집권 직후에 한일 수교로 얻어낸 청구권 자금과 월남파병으로 얻은 재원을 기초로 제1,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달성, 산업화의 토대를 쌓았다. 한국의 민주화 에 필수적인 경제적 기초를 마련했다고 평가할 측면이다.
다. 4.19와 5.16의 상호관계
두 사건 모두 한국이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1960년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1년 남짓의 시간 차를 두고 발생하였다. 두 사건 모두 국민 지지를 얻어 성공했다. 국민적 지지가 모아진 것은 4.19로부터 시작된 국가발전을 향한 변화가 5.16에 의해서도 보완, 발전될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4.19와 5.16이 발생하던 1960년 초의 한국은 다른 아시아 아프리카 등 신생국들에서 발생한 혁명의 요구와 명분으로서 민주발전과 경제발전(근대화)을 동시에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두 사건 발생 당시의 단면적 시각만 보면 갈등, 대립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난 60년을 살아오면서 느낀 경험, 즉 한국 현대사를 발전론적 시각에서 보면 두 사건 모두 국민의 여망 실현이라는 견지에서 상호보완적이었다. 지금부터 반세기 전인 4.19혁명 10주년에 각 대학의 4.19 주역들이 자리를 같이하고 4.19 혁명에 대한 주체적 평가를 시도한 바 있다. 이때 필자는 상호보완론을 주제로 발표했다. 찬성과 반대가 팽팽히 맞섰다. 필자는 지금도 두 사건은 주체와 선후(先後)만 다를 뿐 추구하는 목표에서 큰 차이는 없었다는 생각은 그대로다.
•4.19혁명에 대한 주체적 평가를 주제로 세계대학봉사회 강당에서 1970년 4월 10일 각 대학4.19주역들이 모여 토론회를 열었다( 4월혁명의 주체적 평가보고서, 일월서각 1970)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전두환, 노태우로 권위주의 정권이 이어져 왔지만 어떤 정권도 대한민국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적 규범을 무시하거나 외면한 일은 없었다. 이 점에서 주권재민을 밝힌 4.19혁명의 대의는 역사 속에 면면히 생명력을 유지해왔다.
물론 권위주의 정부들이 경제발전방식이나 국력 신장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한 측면이 많았지만, 그러나 신생국의 국가발전이 자유와 민주만으로 관철되기 힘들다는 경험적 사실에 유의한다면 권리행사의 제한이 반드시 주권재민의 4.19정신을 부정한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 <계속>
<4.19혁명 60주년의 회고와 전망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