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소년병(4) 새 M1소총과 철모, 탄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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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길도형

 

-총 다루는 법 배워 본 적 없고, 말단 소총수에게 부여된 전술적 임무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말단 소총수 편입. 군율과 군기, 명령과 지시, 부대전술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당위 부여돼 

-6월 25일 새벽 이후 춘천, 원창고개, 홍천, 횡성, 원주, 충주까지 휴식 취할 겨를조차 없어

 

 

지난 7월 6일은 음성 동락리와 용원리 일대에서 벌어진 동락리전투(7연대의 음성전투)가 있은 지 70주년 되는 날이었다. 7연대 12중대의 하우스보이에서 소년병이 된 선친도 물론 그 현장에서 북괴군 15사단 48연대의 남하에 맞서 총을 쏘고 거침없이 돌격했다. 7연대 3대대와 2대대가 주축이 된 완벽한 승전이었다.

 

흔히 2대대에 의한 동락국민학교 기습으로 일군 승전으로 정사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그 얘기는 선친으로부터 들은 바 없다. 선친은 저수지 부근의 도로상에서 전투를 벌였다고 했다. 그 저수지가 음성군 생극면 용원리에 있는 신덕저수지이고 거기서 서쪽 생극면 방향으로 바로 붙어 있는 동네가 동락리이다. <글쓴이>

 

소년은 6월 25일 하루 동안 소양강 북단 고지들을 오르내리며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208고지 전투 중 전사한 병사의 M1 소총을 선임하사로부터 받는 것으로 총기 수여식을 대신했다. 총기를 수여하면서 선임하사가 건넨 ‘적을 죽여야 내가 살고 전우가 산다’는 말이 소년이 지금까지 총을 쏜 이유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소년은 전사한 전우의 소총을 들고 철모를 쓰고 탄창 주머니와 수통, 대검집이 달린 탄띠를 허리에 두른 채 하루 동안의 전투를 거뜬히 치러냈다. 총 다루는 법을 배워 본 적 없고, 말단 소총수에게 부여된 전술적 임무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선임하사가 수여한, 전사한 병사의 소총을 부여잡고 ‘나’와 ‘전우’를 위해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긴 1950년 6월 25일, 소년은 자신이 ‘소년병’으로 거듭나고 있음도 자각하지 못했다.

 

소년에게는 중대, 소대, 분대의 구성원으로서 군율과 군기, 명령과 지시, 부대 전술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당위가 부과됐다.

 

7연대는 주력 부대들이 소양강 이북에서만 이틀을 버티며 116고지와 옥산포, 우두산 등 주요 고지에서의 전투를 통해 북괴군 2사단에 막대한 타격을 가했다. 결국 북한강 선까지 후퇴한 적은 26일 예비연대까지 투입하며 재차 공격해 왔다. 국군 2연대가 방어하고 있는 인제 방면에서 홍천을 향해 공격하던 북괴군 2군단 예하 12사단 일부도 춘천으로 급히 방향을 선회했다. 적은 증강된 병력과 화력으로 소양강 북단에 대해 대대적인 공세를 가해 왔다.

 

26일부터 27일 양일 동안 북괴군 2사단은 탱크를 앞세워 우두산을 비롯한 소양강 북단 고지와 진지들에 대대적인 포격을 가했다. 그러나 일발필살의 결기로 무장한 포병대원들의 포격과 중화기 중대의 대전차 공격에 번번이 진영이 와해되며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물러나야 했다. 27일 오후, 소년은 중대원들과 함께 소양교를 건너 봉의산으로 이동했다. 해발 301.5미터의 봉의산은 예나 지금이나 춘천의 주봉으로, 춘천 시가지는 물론 북서쪽으로는 북한강을, 북동쪽으로 소양강 멀리까지 관측할 수 있는 사주경계의 전략적 요충이다.

 

소양강을 건너기 전 이미 궤멸적 1차 타격을 받은 북괴군 2사단은 예비연대에 인제 방면의 12사단 병력 일부까지 증원해서 무수한 사상자를 낸 끝에 28일 소양강을 건넜다. 소양강을 건넌 적들은 봉의산과 그 주변으로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소양강을 건넌 적병들 중 일부가 춘천 시내로 입성을 시작했다. 적 주력 부대가 원창고개를 점령, 차단함으로써 연대 전체가 포위될 수 있다는 우려에 따라 7연대는 28일 주요 방어축선을 춘천 동남방의 원창고개로 이동시켰다. 1대대와 2대대가 원창고개를 돌파하려는 적의 공세에 맞서 분전하는 동안 7연대 주력은 홍천으로 철수하여 29일에는 홍천강 남안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그러나 사단사령부는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서부전선 방어축선의 급속한 남하와 육군본부의 지시에 따라 횡성, 원주 신림고개를 지나 충주에 주둔하기에 이른다.

 

7월 1일 횡성에서 철수한 7연대는 ‘제8사단의 철수를 엄호하라’는 사단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원주 남쪽 14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신림고개(가리파고개)를 점령함으로써 평창에서 제천으로 철수하는 8사단을 엄호하는 데 성공한다. 하루 동안 신림고개를 점령하며 적의 남하를 차단한 7연대는 8사단 10연대에 진지를 인계하고 충주로 철수, 충주중학교 운동장에 집결했다.

 

7월 4일, 6월 25일부터 29일까지 춘천을 사수하며 수원으로 진격하여 서울을 포위하려던 적의 전략적 목표를 무산시킨 7연대는 개전 후 열흘여 만에 부대 재편성에 들어갔다. 인원과 장비를 점검하며 전사상자와 실종으로 발생한 결원을 확인하고 중대별 인원을 재조정했다. 춘천전투를 비롯하여 홍천, 횡성, 원주 신림 전투를 치르는 동안 7연대도 800명이 넘는 적지 않은 병력 손실을 입었다.

 

소년은 12중대의 하우스보이에서 말단 소총수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공식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6월 25일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열외列外의 하우스보이에서 중대, 소대, 분대의 구성원으로서 군율과 군기, 명령과 지시, 부대 전술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당위가 소년에게 부과됐다는 점이다. 물론 그럼에도 소년이 전사하거나 탈영을 한다 해도 그것을 공식화하거나 군법에 회부하여 처벌할 아무런 이유도 근거도 없었다.

 

소년은 중대의 간부들이나 병사들에게 여전히 ‘꼬마’로 불렸다. 군수계원이 소년에게서 전사한 병사의 소총과 철모, 탄띠 등을 회수해갔다. 그리고 새 M1소총과 철모, 탄띠가 지급됐다. 총기 사용법은 이미 실전을 통해서 체득했다. 분대 고참병들이 소년에게 군장 꾸리는 요령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 동안 어깨 너머로 보거나 병사들의 군장 꾸리는 것을 도운 덕분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군장을 꾸릴 수 있었다.

 

7월 3일 저녁, 장호원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말이 병사들에게도 전해졌다. 7연대 병력이 임시 주둔한 중학교 운동장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장호원은 충주에서 직선거리 35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로, 충주와 이천의 중간쯤에 위치한다. 7월 1일 육군본부의 지시로 6사단은 19연대를 긴급히 이천으로 투입했다.

 

19연대는 적과 근접전을 벌이며 적의 남하를 최대한 지연시키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 사단사령부가 충주에 주둔한 가운데 2연대는 충주 방어 준비를 하고 있었고, 7연대는 원주-단양 축선 방어를 8사단에 인계하고 충주중학교로 이동하여 임시 주둔지 정리 및 부대 재편성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장호원이 적의 수중에 들어간다는 것은 사단이 양분될 위기이자 2연대가 적에게 포위, 고립된다는 것을 뜻했다.

 

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7연대장 임부택 중령에게 명령했다.

 

“장호원을 탈환하라!”

 

연대장은 적정을 모르는 상태에서의 야간 이동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날이 밝는 대로 1개 대대를 보내 적정을 확인한 다음 연대 주력을 투입하겠다는 복안을 사단장에게 제시하여 승인받았다.

 

그러나 이미 장호원으로 진출한 인민군 15사단은 곧바로 남하하여 음성 점령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예하 48연대가 음성 동락리로 진출했고 49연대는 무극리로 남하하고 있다는 첩보가 2대대로부터 입수됐다.

연대장은 각 대대장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제1대대는 7월 5일 08시 충주를 출발, 음성으로 이동하여 무극리 방면으로 남하하는 적을 포착하는 대로 섬멸하라. 제3대대는 7월 5일 08시 장호원 방면으로 직진하여 장호원에서 남하하는 인민군을 견제하면서 질서 있게 철수, 동락리 남방 저수지 부근에서 연대 예비대대로 대기하라. 제2대대는 동락리 일대의 고지를 확보하고 3대대의 철수를 지원하라.”

 

저녁 식사를 마치는 대로 연대 전 병력 취침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장마철로 접어든 7월초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야전막사를 짓눌렀다. 출동 대기 상태로의 취침을 지시받은 병사들이 전투화를 신은 채 간이침상에 쓰러지기가 무섭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6월 25일 첫 새벽, ‘비상’ 외침과 함께 잠을 깬 이후 춘천, 원창고개, 홍천, 횡성, 원주를 거쳐 충주까지 철수하는 동안 장병들은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겨를이 없었다. 밤이 깊어 가면서 다행히 공기가 선선해지고, 사방의 벽면을 말아 올린 막사 안으로 시원한 바람도 드나들었다.

 

<대한민국 소년병 연재 리스트>

(1) 부랑아에서 하우스보이로 (2) 춘천전투 포화 속으로
(3) “너는 지금부터 진짜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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