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 친일 행위의 진실

<<광고>>



¶글쓴이 : 백이룸

 

-1920년 생, 1943년 간도특설대에서 민간 약탈하는 마적떼 소탕. 이미 만주엔 독립운동세력 철수

-대한민국 건국 우파 독립운동가들이 간도특설대 출신자들에게 적의가 없었던 것도 이에 기인한다

한미간 최초 연합작전이자 혈맹 시발점인 다부동 전투 승리 이끌어 나라 지켜내. 부디 영면하소서

 

 

백선엽을 빼고 신생국 대한민국을 말할 수 있나

 

큰 별이 졌다. 구국의 영웅 백선엽 장군을 빼놓고는 신생국 대한민국의 역사를 말할 수 없다. 허나 고인을 둘러싼 여러가지 논쟁이 한창이다. 수구좌익 정치세력들과 21세기 무지렁이들은 추악한 정치인의 죽음에는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면서, 국군의 아버지에게는 안장 운운하며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온갖 추악한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무지를 넘어서 오만하기 이를 데 짝이 없다. 과연 그들의 주장은 사실일까? 납득할만한 근거와 논지가 있을까?

고인은 1920년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은 평양에서 지냈다. 이 시대의 한반도인들은 나라가 없던 시절이었다. 태어나 보니 나라가 없었고 당연하게도 그 책임을 이들에게 묻는 것만큼 코메디도 없을 것이다. 7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가정환경을 딛고 약송소학교를 나온 이후 평양사범학교에 진학한다.

 

1939년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교직에 종사했지만 군인의 꿈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1941년 12월 만주국 봉천의 봉천군관학교에 진학하여 제9기로 졸업한 뒤 자무쓰(佳木斯) 부대에 배속되었다. 1943년에는 간도특설대로 전근, 배치되어 3년 동안 이 부대에서 활약한다.

간도특설대, 항시 이 대목에서 수구좌익들의 꼴통끼가 발작한다. 간도특설대의 간자만 나와도 게거품을 문다. 간도특설대에 몸 담았다는 이유만으로 기계적으로 그들이 말하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는 것이다. 이러한 분류와 주장이 과연 타당할까?

만주군 간도특설대는 1938년 설립되어 당시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 계열의 동북항일연군东北抗日连军 및 팔로군八路军 소속 유격 게릴라들을 상대하며 토벌작전을 벌이던 부대였다.

 

동북항일연군의 다른 이름은 동북인민혁명군으로 1935년 제 7차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에서 결정된 ‘반제국주의 인민통일전선‘에 따라 중국 공산당이 조직한 동북인민혁명군이 동북항일연군으로 확대 개편된 것이다. 동북항일연군은 후에 1942년 소련 극동군에 의해 ‘소련적군88특별저격여단’으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정식 개편된다.

 

당시 동북항일연군에서 활약한 한반도인으로는 6.25 전범 김일성을 비롯해 강건, 김광협, 김책, 최용건 등이 있다. 이들 모두는 후에 북조선 괴뢰국의 개국공신이 되어 ‘공화국 영웅’ 칭호를 하사받는 이들이 된다. 팔로군은 중국 공산당의 군대로서 후에 인민해방군人民解放军으로 명칭을 바꾸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중국 공산당 중앙 군사 위원회의 지휘 하에 있는 당의 군대 명칭으로서 오늘날까지 우리가 흔히 일컫는 중공군으로 대표된다.

간도특설대는 만주에서 이러한 동북항일연군 및 팔로군과 싸웠다. 그렇기에 간도특설대에 몸 담았던 백선엽 장군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인 것이다, 이것이 수구좌익 정치세력들과 21세기 무지렁이들의 논리다. 친일이라 함은 만주군에 소속되었던 것이요, 반민족 행위라 함은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을 때려 잡았단 것인데, 실소를 금할 수 없다.

 

43년 배치된 간도특설대의 토벌 대상은 민가 약탈 일삼는 마적떼 팔로군

 

대한민국 그 어디가 그의 묘역이 아니란 말입니까?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1910~1948년 사이에 한반도 및 만주에서 태어나고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친일파가 되는 것이며, 공산당에 맞섰거나 그러한 행위에 가담한 사람들은 반민족행위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그러한 저능한 논지와, 시대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거나 못하는 멍청한 역사 인식으로 당당하게 떠들어 대는지 그저 우스울 뿐이다. 


반민족행위란 것이 타당하게 성립이 되려면 동북항일연군에 소속돼 있던 김일성, 강건, 최용건 등이 대한의 독립운동가가 되어야 한다. 북조선 괴뢰국에서는 그리 가르친다고는 한다. 실상 그들이 만주에서 했던 활동들은 한민족의 진정한 자유와 독립을 위한 활동이라기보다는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는 공산주의 사상의 빨치산 활동이었다.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 유격 게릴라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군대라기보다는 마적떼에 가까웠으며 늘상 화전민들의 식량을 약탈하는 것이 주된 일상이었다. 암울한 시대에 태어난 수많은 만주의 가여운 민중들은 이들의 구원을 바란 적도 원한 적도 없다. 그렇기에 반민족행위라는 것이 전혀 가당치 않은 것이고 실체없는 허상과도 같은 것이다.

더욱이 재밌는 사실은 백선엽 장군이 간도특설대에 배치되기 한참 전인 만주에서는 이미 독립운동세력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김일성을 위시로 한 만주 빨치산파 활동가들은 토벌에 지쳐 1940년 동북항일연군을 빠져나와 소련 연해주로 망명하여 소련군에 배속되었고, 또한 독립운동의 주류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광복군 등 우파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은 그보다 훨씬 더 전에 만주를 빠져나와 중국 화북지역 이남의 훗날 중국 공산당과 맞서는 국민당 정부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후일 대한민국 건국의 중심축을 이룬 우파 독립운동가들이 간도특설대 출신자들에게 특별한 적의가 없었던 것도 이에 기인한다. 이들이 맞서 싸운 적들은 주류 독립 운동가들의 앙숙이었고, 훗날 대한민국에 암적인 존재가 되는 공산주의자들에 맞선 군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즉 백선엽 장군은 만주에서 독립군 혹은 광복군 등과는 총부리를 맞댄 적도 없을 뿐더러 그의 주 토벌 대상은 민간 약탈을 일삼는 마적떼로 변모한 팔로군 유격 잔당들과 빨치산 잔당이었다. 이것이 바로 더불어민주당과 정의, 민중당으로 대변되는 수구좌익 꼴통퇴보 세력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백선엽 친일 행위의 진실이다.

 

해방 후 평양에서 조만식 선생 비서로 활동, 45년에 월남


이후 백선엽 장군은 해방 직후 평양으로 돌아왔고 동향 사람인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일하다가 김일성이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된 후, 1945년 12월 월남한다.

 

월남 직후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국군의 모태인 국방경비대에 입대, 1946년 2월 부산 제5연대 A중대장으로 임명된다. 국방경비대가 정식 국군으로 건립되고 나서는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복무하였으며, 이때 벌어진 여순 반란사건의 책임자가 되어 공산 게릴라 소탕과 숙군 작업, 주동자 색출 및 처벌의 재판장이 되었다.

 

1950년 4월에는 대령 계급으로 국군 제1보병사단장이 되어 개성지역을 담당하면서 6월 당시에는 경기도 시흥에서 고급간부훈련을 받는 중에 소련공산당과 스탈린을 등에 업은 김일성의 불법 남침으로 전쟁에 임하게 된다.

백선엽의 일평생 삶은 공산주의와의 전쟁 그 자체였으며 한반도의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증오의 대상 그 자체였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이승만, 국군을 대표하는 백선엽 이 둘은 한반도의 붉은 혁명, 공산 제국을 꿈꾸던 자들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이름이었고, 미국보다 더 혐오스러운 존재였다.

 

김일성 입에서 이 둘의 이름이 떠날 날이 없었다. 그렇기에 백선엽 장군을 둘러싼 논란과 폄하가 이해되는 대목이다.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고 여기는 이들에게는 백선엽이 얼마나 눈에 가시 같을까. 그렇다 해도 분명한 역사적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욕하고 침뱉고 매도한다 한들 그 속의 실체적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6.25 전쟁이 발발한 후 국군과 초기 UN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북조선 인민군을 막을 수가 없었다. 밀리고 밀려 낙동강까지 내려온 50년 8월 16일, UN군 총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오키나와에서 B-29를 98대나 출동시켜 왜관을 점령한 인민국을 향해 융단폭격을 가했다.

 

하지만 미군의 융단폭격에도 불구하고 인민군의 총공세는 이어졌고 18일에는 대구 시내에까지 인민군의 포탄이 떨어졌다. 이 충격으로 정부는 대구에서 부산으로 이동했고 대구 시민들은 엄청난 혼란에 빠져 아비규환이 되었다. 오죽했으면 조병옥 내무부 장관이 직접 가두에 나서서 민심을 수습한 뒤에야 질서가 회복되었다.

 

절체정명의 상황, 20일 다부동에 투입된 미 27연대마저 국군 11연대가 철수하니 자신들도 철수하겠다는 통보를 백선엽 장군에게 하려 한다. 이는 사실 조금 와전된 것인데 488고지에서 보급로가 원천 차단된 11연대 장병들은 그야말로 이틀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 만다. 그렇기에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퇴각하는 것이 철수하는 것으로 미 수뇌부에 보고가 올라간 것이다.

 

포탄이 오가는 지옥 속에서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는 여건, 이것이 당시 국군과 초기 UN군의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자세히 알 수가 없었던 미군의 수뇌부들은 국군이 퇴각한다는 보고를 받고 자신들이 도망치면 우리가 싸워야 할 이유가 도대체 뭐냐 라며 분통을 터트리고 항의와 철수 의사를 밝히려 백선엽 장군을 찾아간다.

 

 

이 전투를 계기로 대한민국의 국군과 미합중국의 미군은 끊어질 수 없는 유대감을 형성하게 되었다.

 

다부동 전투, 한미간 최초의 연합작전 전투이자 혈맹의 시발점


백선엽 장군에게 항의하러 현장으로 달려간 미군의 지휘관들은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는데, 바로 사단장 백선엽 자신이 직접 권총을 뽑아 들고 선두에 서서 돌격하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11연대가 물 한 모금 마시고 후퇴하자 백선엽은 병사들 앞에서 외쳤다.

 

“미군도 이 낮선 땅에서 싸우는데 우리가 후퇴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내가 선두에 설 테니 내가 후퇴하면 자네들이 나를 쏴라.”

 

이것이 바로 국내외 전쟁사에서 사례를 찾기 힘든 희귀 사례인 백선엽의 지휘관 돌격이다.국군에서는 “너희들이 나를 쏴라, 돌격!”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사단장이 직접 돌격하는 모습을 본 병사들은 이내 모두 사기와 분기가 탱천하여 다시 전장으로 일제히 돌격하는 경관이 실현되었다. 당시 이를 직접 본 미 27연대의 마이켈리스 대령은

 

“사단장이 직접 선두에 서는 한국군은 신의 군대다”

 

라며 경탄을 금치 못했고 국군의 철수 보고를 올린 미군의 장교들은 백선엽 장군을 찾아와서 사과하였다.

한편,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며 대한민국 정부가 있는 대구를 함락하고 부산만을 목전에 두고 있던 김일성의 인민군은 마지막 함락을 위하여 다부동에 주력군 3개 사단 13만 명을 동원하여 총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백선엽이 이끄는 국군 제1사단에 막혀 부산으로의 진격은 실패를 맞게 된다.

 

8월 총공세를 막아낸 1사단에 의해서 부산에 미1기병 사단과 UN의 추가 증원군이 상륙하였고 28일 1사단은 다부동을 미1기병 사단에 이양하고 팔공산으로 이동하여 전력재건을 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맥아더 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전쟁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다부동 전투는 승리의 의의뿐만 아니라 인민군 주력3개 사단을 미8군의 지원과 함께 단독 사단으로 막아낸 역전의 드라마였고, 또한 한미간 최초의 연합 작전 전투가 되어 함께 피를 흘려가며 전우의 시체를 쌓은 한미혈맹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 전투를 계기로 대한민국의 국군과 미합중국의 미군은 끊어질 수 없는 유대감을 형성하게 되었다.

 

9월이 되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핵심 교통로인 경부축선이 차단당한 인민군들은 퇴로를 잃게 된다. 다수의 병력은 험준한 중부 산악지대를 따라 북으로 이동했지만, 퇴각 기회를 놓친 병력과 대한민국에 남아있던 남조선로동당 남부 6개(충남충북, 경남경북, 전남전북) 도당의 공산주의자들이 잔류하여 빨치산 활동을 벌이도록 조치된다.

 

특히 모택동은 국공내전의 경험을 살려 김일성에게 대한민국 후방에 4~5만 명의 조선 인민군이 남아 후방 교란 임무를 계속 수행하면, 향후 중공군이 가세해 반격할 때 큰 역할을 해낼 것이라며 잔류해 적극적인 빨치산 활동을 권고한다.

 

백 야전사의 빨치산 대토벌, 일명 쥐잡기 작전 

 

결국 빨치산 활동을 위해 후방에 잔류한 조선인민군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백운산, 덕유산, 회문산, 백아산 등 험준한 산악지역 곳곳에 근거지를 두고 후방 교란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이 후방 치안을 교란하며 큰 위협이 되자 육군본부는 ‘작전명령 제216호’를 통해 빨치산 토벌을 전담할 제3군단을 창설한다.

 

1951년 대대적인 상반기 토벌 작전을 벌여 후방 빨치산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으나 작전 과정에서 무고한 희생이 따르는 거창 사건 같은 문제점도 뒤따랐다.

 

이는 제 11사단장 최덕신 준장이 과거 국민혁명군 시절 중국 공산당 유격대를 상대한 경험이 크게 작용해 조금의 여지도 남길 수 없다는 견벽청야 작전을 고집한 영향이 컸다. 전쟁의 특수성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부분이지만 그럼에도 마냥 좌시할 수 만은 없는 것 또한 현실이었다.

 

살아남은 빨치산 세력들은 지리산 중심으로 재결집해 인근의 하동, 운봉, 곡성 및 전라선 철도를 계속해서 교란했다.결국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전방이 소강상태인 틈을 타 야전사단 일부를 빼내 겨울 3개월 내에 후방을 완전히 정리할 계획을 세운다. 전쟁이 지속될수록 후방 빨치산들의 교란에 발목을 잡힐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밴플리트 장군은 만주에서 팔로군 게릴라 토벌 경험이 있는 백선엽 장군을 전방에서 불러들여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TASK FORCE PAIK’ 즉 백 야전전투사령부를 창설해 대토벌 작전을 지휘하게 한다. 백 야전사는 2개 야전사단(수도사단, 제8사단) 서남지구전투사령부, 전투경찰부대를 예속시켰다. 작전명은 ‘OPERATION RAT KILLER’ 일명 쥐잡기 작전이었다.

 

백 야전사의 토벌전은 12월과 1월 초 1, 2기로 나뉘어 지리산 포위전과 외부의 주요 거점 정밀 타격으로 전개되었다.

1월 18일까지 전개된 작전으로 빨치산 약 300명이 사살되고, 251명이 포로가 되는 등 지리산 빨치산 전력의 약 반 수가 궤멸되는 등 남부군(빨치산) 전력은 크게 손상되어 후방부대 및 전투경찰부대 만으로 상대가 가능한 수준으로 위축되었다.

 

백선엽 장군은 이렇게 약 2개월 동안 예하 부대들을 효과적으로 운영하여 단기간에 빨치산 세력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특히 그는

 

“투항자에게는 죄를 묻지 않고 절대 신변의 안전을 보장한다.”

 

는 사면장에 자신의 사인을 넣어 비행기에서 살포한 덕에 수많은 공산 빨치산 게릴라 유격대원들을 사면장을 들고 항복하게 만든다.

 

이는 제11사단장 최덕신과는 확실히 다른 접근이었다. 최덕신은 견벽청야 작전을 실행하며 “100명의 공비를 사살했다고 할 것 같으면, 그중에 상당한 부분이 양민일 것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하며 민간인의 희생을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했다.

 

이는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말을 쓰는 마을에서 누가 인민군 잔당 남부군인지 또는 누가 빨치산의 밀고자인지 또한 누가 무고한 양민인지 그 누구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 책임은 불법으로 전쟁을 일으켜 비극을 몰고온 김일성 괴뢰도당에게 물어야 마땅하다.

 

 

‘국가가 없으면 나도 없다’는 영웅은 이제 갔습니다. 부디 영면하소서.

 

전우의 시체를 넘는 눈물과 광기의 시대를 넘었지만

 

후방 지역에서의 토벌 작전으로 인해 군경에 대한 민심이 악화되는 것 또한 피할 수 없는 백 야전사의 숙명이었다. 오죽했으면 김성수 부통령이 백선엽 장군에게

 

“주민들 생활이 도탄에 빠져있는데 군경의 민폐가 심한 현실을 직시하고 부디 국민을 애호하여 민간에 폐를 끼치지 말고 치안을 확보해 국민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해달라.”

 

며 서한까지 보내기도 했다.

백선엽 장군은 이 부탁을 성실히 이행했다. 이 과정에서 오히려 국군의 안타까운 손실도 있었지만 그는 당연히 자신히 감수해야 하는 영역이라 생각하고 그저 임무를 수행할 뿐이었다. 이 때문에 토벌 작전 중 적성지역에서 발견되는 이들은 원칙적으로 생포하여 포로수용소로 보내고, 그곳에서 실제 빨치산과 양민을 구분해 내도록 하였다.

 

이 방식으로도 작전 과정에서의 안타까운 군과 민간의 희생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불필요한 희생이 백 야전사 투입 이후에 급격하게 준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에, 국민혁명군 및 광복군 활동을 한 최덕신은 양민 학살의 오명을 남겼고, 반 대한민국 세력들에게 간도특설대 경력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매도되는 백선엽 장군은 이들을 보호하며 성공적인 토벌 작전을 전개했다는 점이다.

 

공과가 뒤섞인 한국 현대사에서 단면적인 평가가 불가하고 역사적 인물의 평가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현대사에서 인물이 평가를 뛰어넘는 세 사람이 있는데 이승만, 백선엽 그리고 박정희 바로 이 세 사람이다. 이유는 명명백백하다. 평가는 사견의 영역이고 인물은 실존의 영역이기에, 초월적인 탁월한 결과는 과정의 당위성을 초월하기에.

 

진심으로 무지의 광기를 쏟아 대는 당신들에게 묻고 싶다. 과연 누가 죄인인가? 누가 친일파며, 누가 반민족행위자인가? 그것을 누가 정하나? 격동의 시대를 넘어선 이들을 겪지 않은 이들이 평가한다는 것이 옳은 일인가? 당신들은 무엇을 겪었고 어떤 시대를 살아왔나? 이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바쳤나.

피와 땀, 전우의 시체를 넘는 눈물과 광기의 시대를 배부르고 등따시게 자란 이들이 논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역사란 한가하게 책상에 앉아 풍류를 읊고 부모를 파는 이들이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역사란 실체적 진실과의 마주침이다. 마주침이 싫고 인정함이 싫어 외면하고 매도하고 버리는 것은 역사의 교훈이 아니다.

 

신생국 대한민국의 역사란 한 인간이 왔다가 갔다는 실존이다. 한 인간이 그곳에 서 있었다. 무수히 많은 한 인간들이 피를 뿌렸고, 시체를 넘었고, 눈물을 삼켰고, 울었고, 아팠고, 웃었고, 기뻤다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다. 당신들이 함부로 정의할 수 없고 폄훼할 수 없고 평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역사이다. 

 

부디 영면하소서. 

 

<<광고>>



No comments
LIST

    댓글은 닫혔습니다.

위로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