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소년병(1) 부랑아에서 하우스보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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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랑아에서 병영의 하우스보이로

 

¶글쓴이 : 길도형

 

-강원도 화전민에서 인천의 염상鹽商으로 빠른 시간에 변신하는 데 성공한 소년의 아버지

-군부대 취사반에 식재료 배달해주며 병사들과 친해지고, 병사들의 개인적인 심부름까지

-춘천 병영의 하우스보이에서 두 달 뒤 느닷없는 포성과 함께 소년병으로 변신해야 했는데

 

 

6.25전쟁 개전초부터 종전까지 국군 제6사단 7연대의 모든 전투 최일선에 있었던 한 소년병의 무용담을 논픽션으로 정리하면서 왜 소년병이었는지 밝힐 필요가 있어 썼습니다. 초라한 가족사를 드러내 보여야 하나 부끄러워 망설였지만, 한 소년병의 6.25 참전 무용담을 무명소졸이나마 가필해 두어야 할 이유를 나이 먹어 깨달았습니다. 그 소년병이 바로 나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글쓴이>

 

1939년 늦가을 어느 첫 새벽,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방태산 산골짜기에서 화전민 일가족이 길을 떠나고 있었다. 힘깨나 써 보이는 사내가 진 지게에는 알강냉이며 콩과 팥, 좁쌀 자루 몇 포대가 실려 있었다.

 

사내가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산골짜기 아래를 향해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사내의 아내가 낡은 이브자리며 옷가지들을 단단히 옭아맨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등에는 두 돌 남짓해 보이는 사내아이가 포대기 속에 업혀 있었다. 여남은 살 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와 예닐곱 살 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도 멜빵을 한 채 등짝에 무언가를 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부모를 따라 걸었다. 늦가을 찬바람이 텅 빈 화전민 움막을 훑고 와 골짜기 아래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일가족을 배웅했다.

 

해가 중천을 지날 무렵 일가족이 현리에 도착했다. 소년의 아버지가 현리 장터 곡물상으로 가서 지게에 지고 온 곡식들을 돈으로 바꾸었다. 일가족은 내린천과 소양강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여러 날 걷다 쉬다 하면서 어느 이른 아침 춘천에 도착했다. 그렇잖아도 남루한 화전민 일가족이 지치고 고단하기까지 한 행색으로 춘천역 역사 안으로 들어섰다. 지난 여름 개통되고 이제 막 운행을 시작한 경춘선 종착역 춘천역에는 기차를 타려는 사람들이 표를 끊고 개찰구 검표를 거쳐 줄지어 플랫폼으로 나가고 있었다.

 

소년은 멜빵에 봇짐을 진 채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들이 방태산 산골짜기에서는 보지 못 한 것들이었다. 아버지 손을 잡고 현리 5일장에 나가 보던 번잡함과는 비교할 수 없는 복잡함 속에서 사람들이 움직였다. 그러는 사이에 소년의 아버지가 기차표를 끊어 와 식구들을 개찰구 통로로 몰았다.

 

개찰구 검표원 옆에 섰던 순사가 남루한 행색의 일가족을 멈춰 세웠다. 순사는 소년의 아버지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소년은 순사의 질문에 답하는 아버지 입에서 나온 ‘인천’이라는 말을 놓치지 않았다. 소년은 인천이라는 말에 적이 마음이 놓였다. 처음 듣는 동네 이름이지만, 그 곳에는 방태산 산골짜기 화전민 아들의 일상과는 다른 나날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용문산전투 전선으로 투입되기 전 군장검열 중인 국군 제6사단 병사들. 또는 1949년 국방장관 검열 장면.

 

이윽고 시커먼 증기기관차가 씩씩거리면서 플랫폼으로 들어섰다. 그 뒤에는 객차 몇 량이 줄지어 달려 있었다. 증기기관차를 처음 본 소년은 두려움보다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연신 뿜어 나오는 희부연 연기를 바라보았다.


기차가 멈추고 사람들이 앞 다투어 기차간으로 들어갔다. 소년은 아버지에게 등이 떠밀려 기차에 오르기 전까지 난생처음 타보는 이 기차가 데려 갈 자신의 미래를 그려 보았다. 그러나 방태산 산골짜기 예닐곱 살짜리 화전민 아들의 상상력은 방태산이며 오대산을 힘겹게 넘어가던 하얀 구름의 꿈일 뿐이었다. 그냥 막연히 산골짜기의 생활을 벗어나 보고 싶다거나, 아니 그것보다는 산토끼와 멧새를 더 많이 잡아 겨울이 끝나기도 전부터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먹어야 했던 송기(소나무 속껍질)를 안 먹어도 되는 기대감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춘천이란 도시에 들어설 때부터 자신에게도 뭔지 모를 낯선 꿈이 움트고, 기관차가 멈추기를 기다려 기차간으로 첫 발을 올려놓는 순간에는 설렘으로 요동치는 가슴이 느껴졌다.

 

아침 여덟 시에 춘천을 출발한 기차가 점심때가 지나 서울 종착역인 성동城東역에 도착했다. 일가족은 청량리에서 전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했다. 서울역 인근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묵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인천행 기차에 올랐다. 일가족이 부평역에 내린 것은 방태산 골짜기를 떠난 지 이십여 일 만이었다. 부평역에는 인천 우편국에서 일하는 소년의 외삼촌이 나와 있었다.

 

소년의 가족들은 경인선 철길 남쪽 야산 아래 거처를 마련했다. 소년의 아버지는 외삼촌의 소개로 주안염전 삯꾼 염부로 일을 시작했다. 일본인 주인은 다른 삯꾼들보다 갑절로 일을 하고도 거뜬한 소년의 아버지에게 마음이 끌렸다. 일을 시작한 지 단 며칠 만에 소년의 아버지는 정식 직원으로 채용됐다. 그렇게 소년네 가족은 조금씩 인천에서의 생활 기반이 잡혀 나갔다.

 

소년은 어느 날부터인가 아버지가 염전으로 출근할 때면 함께 따라나섰다. 삯꾼들 잔심부름을 해주면 군것질거리를 주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거스름돈으로 남겨오는 동전 몇 닢씩을 남겨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때때로 일본인 사장이 주는 용돈은 동전 수준을 넘어 지전 두세 장씩이었다. 그럴 때마다 소년은 고개를 90도로 숙이며 “아리가또 고자이마쓰!” 하고 소리쳤다.

 

그렇게 십정동으로 이주한 지 일 년여가 흘러 소년이 여덟 살 무렵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염전에서 돌아오자 집에 낯선 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아버지가 손님과 반갑게 인사했다. 양평에 사는 먼 친척이라고 했다. 친척 어른은 이틀 밤을 자고 사흘째 되는 날 양평 자기 집으로 간다며 집을 나섰다. 친척 어른의 손에는 소년의 손이 쥐어져 있었다.

 

소년의 어머니가 소년 앞에 허리를 구부리고 소년에게 말했다.

 

“너는 오늘부터 이 어른 집에 가서 살도록 해라. 어른께서 잘 먹여 주고 학교도 보내 주신다니까 가서 말 잘 듣고 학교 공부도 잘 하도록 해라.”

그리고는 소년을 꼬옥 안았다가는 떼어 놓으며 저고리 고름으로 눈물을 닦았다. 소년은 내키지 않고 가슴이 먹먹해졌지만, 어른들이 하는 일이니까 따라야 하나 보다 하며 친척 어른의 손에 이끌려 집을 떠났다.

 

소년이 집을 떠나고 3년여가 흘렀다. 소년의 아버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주안염전으로 가서 일했다. 하루 품삯을 받는 것으로 일을 시작한 뒤로 상당한 규모의 염전을 관리하는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소금을 도매로 떼다가 도도매나 소매로 팔기 시작하면서 강원도 화전민에서 인천의 염상鹽商으로 빠른 시간에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생활이 안정되자 어느 날 소년의 아버지는 양자로 보낸 아들도 볼 겸 양평 친척집을 방문했다. 소년의 아버지가 들어서자 친척 어른 내외는 호들갑을 떨어가며 반갑게 맞았다. 그러나 내외의 환대는 기분 나쁘게 비굴해 보였고 전전긍긍하는 눈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안주인이 내온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키던 소년의 아버지는 지게 한가득 섶나무를 짊어지고 마당으로 들어서는 아들을 보았다. 퀭한 눈에 푹 꺼진 두 볼, 금방이라도 꺾일 것 같은 모가지를 앞으로 늘어뜨린 소년의 모습은 피골상접 그 자체였다.

 

소년의 아버지는 가타부타 따질 것도 없이 막걸리 잔부터 내던졌다. 그리고는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자신을 쳐다보는 아들의 지게작대기를 빼앗았다. 소년의 아버지는 노여움 가득한 눈을 부라리며 친척 어른에게 지게작대기를 휘두르고 발길질을 해댔다. 휘두르고 걷어차는 대로 얻어터진 친척 어른이 복날 몽둥이질에 개 널브러지듯 마당에 쓰러져 피를 흘리며 헐떡거렸다.

 

소년의 아버지가 소년의 등에서 섶나무 가득한 지게를 벗겨 번쩍 들어 숨을 할딱거리는 친척 어른한테 내던졌다. 친척 어른의 몸뚱이가 섶나무에 덮여 버렸다.

 

소년의 아버지가 소년의 손을 틀어쥐고 말했다.

 

“가자!”

 

3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소년은 아버지 일을 도와 소금 장사를 시작했다. 형이 중학을 마치고 상급학교로 진학하고 동생이 국민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불운한 운명은 늘 소년의 몫이었다. 그렇게 아버지 밑에서 소금을 져 나르며 소금장수 일을 배우는 동안 인천에도 해방이 찾아왔다. 해방과 함께 주안염전의 일본인 주인들이 쫓기듯 일본으로 돌아갔다. 염전 일부를 인수한 소년 아버지의 소금 장사는 멀리 충청도며 경상도, 황해도에서까지 찾아와 입도선매를 할 정도로 번창했다.

 

1946년 3월, 소년의 나이 열세 살 때였다. 소년은 국민학교 3학년에 보내졌다. 그러나 열 살도 되기 전부터 구르는 돌이 되어 버린 소년은 단 며칠 만에 학교를 떠났다. 학교를 떠난 소년은 집으로 가는 대신 부평역으로 가서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염전 심부름을 해주며 모은 푼돈과 일본인 주인이 준 용돈, 아버지 일을 도우며 받은 용돈이 소년의 저고리 안주머니를 채우고 있었다.

 

부랑하는 소년은 서울과 양평을 거쳐 1949년 겨울 초입 춘천에 다다랐다. 춘천역에 내린 소년은 꼭 십 년 전 방태산 골짜기 움막을 벗어나 춘천역 플랫폼에서 기차에 오르던 날을 떠올렸다. 소년은 뭔지 모르게 자신에게 미안해졌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때 설레던 기대감은 지금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다.

 

심부름이든 날품팔이든 닥치는 대로 하면서 춘천을 떠돌던 소년은 1950년 초입 소양강 다리를 건너 어느 군부대 옆 상회商會의 문을 두드렸다. 낡은 문이 열리고 땅딸보 사내가 나와 소년을 바라보았다. 사내의 뒤 좌판에는 이런저런 잡화들이 어지러이 진열되어 있었다. 가게 어느 구석에서 막걸리가 익어 가는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소년은 땅딸보 주인에게 일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했다. 땅딸보는 돋보기 너머로 소년을 훑어보더니 대뜸 군부대 심부름부터 시켰다. 소년은 땅딸보가 시키는 대로 물건들을 손수레에 싣고 군부대로 갔다. 위병소 앞에 이르자 위병이 익숙한 듯 손수레 속 물건들을 살피다 말고 소년을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처음 보는 얼굴이구나. 땅딸보네 새로 온 아이냐?”

 

소년이 자초지종을 얘기하자 위병은 알았다며 통과를 지시했다.

 

소년은 거의 날마다 수레에 물건을 싣고 들어갔다가 빈 수레를 끌고 나오고는 했다. 소년이 배달하는 물품들은 대부분 취사반으로 갔다. 그러는 동안 막사 앞을 오가며 병사들과 친해졌고, 쉬쉬해 가며 병사들의 개인적인 심부름도 했다. 하사관들과 장교들까지도 소년과 안면이 익숙해지며 먼저 소년에게 말을 건네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4월의 어느 일요일, 소년은 그 날도 취사반에 식재료 배달을 갔다. 식재료를 배달하고 막사 앞을 지나는 소년에게 병사들이 아는 체를 했다. 소년도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소년이 병사들과 농담과 장난을 주고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이에 일직사관이 다가왔다. 선임 병사로부터 휴식 보고를 받은 일직사관이 병사들과 대화를 하다 말고 소년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도 배달 온 모양이구나. 그런데 네 이름이 무엇이냐?”
“○○○입니다.”
“몇 살이냐?”
“열일곱입니다.”
“아버님은 뭐 하시냐?”
“인천에서 소금 장사 하십니다.”
“고향이 인천이냐?”
“아닙니다. 강원도 인제입니다.”
“인천에서 아버님 일이나 도울 일이지 여긴 웬 일이냐?”

 

소년은 말문이 막혔다. 일찌감치 객지 남의 집에서 머슴 아닌 머슴살이를 하는 동안 소년에게는 역마살이 끼었다. 소년은 무슨 못 할 짓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미안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냥요.”

 

일직사관은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차더니 빙긋 웃으며 객쩍은 질문을 던졌다.

 

“열일곱 살짜리 키가 제법이구나. 너 군인 시켜 줄까?”

 

소년은 눈이 동그래지며 답했다.

 

“저 정말요? 시켜 주면 하지요!”

 

농담 삼아 던진 제안에 반색하는 소년을 보고 일직사관이 껄껄 웃더니 말했다.

 

“너 이 녀석, 여기서 따로 갈 데가 없는 모양이구나. 잔심부름이나 도우며 여기 머물도록 해라.”

 

소년은 그렇잖아도 군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었다. 제복을 입고 어깨에 총을 멘 군인의 모습은 교육이란 것을 받아 본 적 없는 소년에게는 감히 넘볼 수 없는 특별한 신분 같은 것으로 여겨졌었다. 그 날 이후, 그렇다고 해서 소년의 역할이 사실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다만, 땅딸보 집에서 하던 숙식을 군부대에서 해결하게 된 정도였다.

 

병사들 막사 침상 끄트머리에 소년의 자리가 마련됐다. 소년에게 여벌 군복 한 벌이 주어졌고 점호와 취침시간이 기간병사들의 규칙 그대로 소년에게 적용됐다. 그러나 낮 동안의 일과는 열외였다. 중대 병사들이 훈련을 하고 작업을 하는 동안, 소년은 부대 내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불려 다니며 처리하고 간부들의 심부름을 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대신했다. 소년은 그렇게 춘천 한 병영의 하우스보이가 되었다. 그러나 하우스보이는 두 달 뒤 포성과 함께 소년병으로 변신해야 하는 운명을 알지 못했다.

 

♦’춘천전투 포화 속의 소년병’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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