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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얀 야노브스키 (독일 외무부 한반도정책 과장)
-장마당과 돈주 등 현상 보고 북한 변화 낙관하는 것은 위험. 외부 조언이나 지원에 반감 심해
-북한 체제 결함에 침묵해 국제사회의 북한 인식을 바꾸면 북한 당국도 바뀐다는 이론은 위험
-북한 인민 지원 필요하지만 접촉·모니터링 요구해야. 모니터링을 북한사람이 맡는 것은 반대
이 글은 지난 12월 10일(화)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창립20주년 기념행사로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시그니처 컨벤션웨딩에서 열린 ‘김정은의 북한,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는가’ 주제의 세미나에서 필자가 발표한 것입니다. <편집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독일연방외무부 한반도 과장 야노프스키 얀입니다. 반갑습니다. 2012년부터 2015년까지 평양에서 독일대사관에서 일했고 2015년부터 우리의 대한반도 정책을 총괄하는 과장입니다.
세계인권의 날을 여러분과 같이 보내게 되어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의의 있는 날에 의의 있는 행사에 초청해주신 권은경 대표님께 사의를 표합니다.
오늘의 세미나의 주제는 ‘김정은의 북한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는가?’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 항의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북한은 김정은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북한은 한 사람의 소유가 아니고 2500만 명 전체 인민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오늘 세미나의 주제인 ‘변화’가 흥미롭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북한이 변화하고 있나? 그렇다면 어떻게, 어떤 분야에서 어떤 방향으로 변하고 있나? 참 제가 하루에 수십 번이나 고민하는 문제입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확답을 못 찾은 문제이기도 합니다. 북한에 대한 팩트를 캐내는 것이 특별히 어려워서 그렇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변화’라는 말이 개념으로서 무서울 정도로 광범위하면서도 애매하기 때문입니다.
이 연설을 준비할 때 그래서 잠시 이렇게 생각해봤습니다: 제가 삼 주전에 북한을 방문했는데 그냥 거기서 보고 느낀 것에 대해서 말씀 드려볼까? 그런데 생각 끝에 이것보다 훨씬 지루할 수도 있는 변화에 대한 이론적인 또는 정책적인 접근으로 연설을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미리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변화와 지속성
이것은 흥미로운 긴장관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50년대의 동독 공산당인 사회주의통일당 당원들마저도 북한 체제를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이미 만들기 시작했던 1인지배체제는 동독 외교관들도 “공산주의의 국제 연대성에 대한 도전이자 사회주의에 대한 어이없는 희화화 시도”라고 평가했습니다. 심지어 얼마 뒤부터 자기 나라에서도 금언이 된 문구를 되풀이 하기 시작합니다: 북한 ‘체제의 변화가 절실하다’고 베를린에 보고를 하는 겁니다. 공식적으로 형제 같은 연대성을 서로 확약하며 뒤로는 북한이 사회주의 진영 전체의 위상을 흐리게 한다는 말이 동독에서 나오기 시작합니다.
국가기밀 하나를 살짝 말씀 드리자면 – 70년 뒤에도 평양 주재 대사관에서 보내오는 외교 케이블들의 내용이 특별히 다르진 않습니다. 북한의 같은 문제점들을 집어보고 이러한 체제가 영원히 갈 수 없다고 평가들 합니다. 50년대의 동독 외교관들과 오늘날의 통일독일 외교관들이 같은 체제를 묘사하고 같은 분석을 해서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셈이죠. 그러나 동독 외교관들이 대표했던 나라가 이미 29년 전에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고 북한은 여전히 1인지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이 가는 길이 옳다는 것이 물론 아니죠. 그리고 50년대의 북한과 2019년의 북한이 다름이 없다는 것이 또한 전혀 아니죠.
북한에서 많은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혹은, 더 엄격하게 표현해서, 북한에서도 많은 것들이 달라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역시 이 변화 중에서 의미가 있고 더 중대한 변화를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현상들이 무엇일까? 그리고 이런 현상에서 독일과 국제사회의 역할이 무엇일까? 참으로 중요한 문제들이죠. 많이 부족하겠지만, 이에 대해서 오늘 간략하게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독일의 대북정책은 ‘협력해야 한다’도 아니고 ‘협력해서는 안 된다’도 아닙니다. ‘협력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들리겠지만 어마어마한 결론입니다.
북한이 변하지 않은 동시에 변하고 있다
어느 날 생각해보니까 북한이 정말 양자역학의 중요한 사고 실험인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비슷한 사례인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직접적으로 측정하거나 관측하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북한이 변했는지 안 했는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 문제부터 출발해야죠. 우리가 변화를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고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따라 북한 변화 여부에 대한 답이 또한 다를 것입니다. 우리의 변화 기준이 또한 북한보다 우리의 사고 방식과 접근법에 대해서 더 많이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정치학에서는 ‘정치는 인식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북한도 역시 인식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제3국과 대북문제에 있어서 협력하는 기준이 아주 간단하며 명확합니다. 국가간에 이해관계는 충분히 다를 수 있습니다. 아니, 현실적으로 같을 수가 없죠. 그러나 기본적으로 문제에 대한 분석만 비슷하면 이를 바탕으로 서로의 이해관계에 맞게 협력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분석부터 다르면 협력이 그만큼 어려워집니다.
명확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그 공백을 너무나 쉽게 우리의 생각과 희망사항으로 가득 채우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저도 예외가 아니죠.
실례를 들자면, 많은 이들이 북한의 청년들에게 희망을 찾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또한 거의 유일한 희망이 청년들, 즉 장마당 세대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평양주재 대사관이 2년반 동안 압박과 부탁을 병행한 결과 드디어 북한 내 두 개의 대학에서 우리 외교관들이 독일어 교육을 진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난달에 수업을 처음으로 참관하여 젊은 학생들의 열정과 자신감을 보고 정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심지어 외국인에 대한 꺼림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거죠. 그러나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일반화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엄격하게 말씀 드리자면, 학생들이 똑똑하다고 해서 혹은 주민들이 밤에 집마다 케이드라마를 본다고 해서 사회가 바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변화는 객관적으로 측정하기 불가능한 것뿐만 아니라 그저 일방통행으로, 직선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우리는 한동안 돈주들이 북한 사회를 완전히 탈바꿈시킬 역할을 수행할 거라고 믿어왔죠. 유럽국가들 사이에서도 돈주들을 지원해야 되지 않을까 많은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까 오히려 많은 경우에는 돈주들이 서방의 힘을 받을 생각도 안 하고 자기가 번 돈으로 당으로부터의 자유를 보장 받기보다는 오히려 당중앙과 더 가까이 지낼 수 있게끔 자기 돈을 쓰고 있죠. 중국 사례나 베트남 사례를 보면 거기서도 사회적 통제 밑에 자본주의로의 전환이 정권 반대보다 정권 안정을 가져왔죠.
북한 고위 관계자가 저에게 돈주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라고 할 때 이야기한 비유에서도 그런 문제가 잘 나타나죠.
“요 백 불을 보시오. 이 백 불을 보위부 간부한테 줘서 중대한 법적 책임도 피할 수 있는 것이 오늘의 조선입니다. 당신들이 생각할 때 참 좋은 거죠?”
저는 당연히 ‘예’라고 답했죠.
“이제 다시 보시오. 같은 백 불을 보위부 간부한테 줘서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제 리해합니까? 단순히 돈을 늘린다 해서 이 조선을 바꾸지 못할 것입니다.”
사회적 통제로 서로간의 신뢰가 많이 깨진 사회에서 사회적 변화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죠. 어떻게 보면 북한 같은 애매한 혼합체제가 단순한 서방식 자본주의 체제보다 이기주의를 더욱 더 야기할 수도 있죠. Survival of the fittest 그것이 요즘 평양의 일상입니다.
이것을 또한 보여주는 것이 우리가 선의를 보여주며 열린 사고를 가지는 사람을 혹은 새로운 세대를 지원하는데 북한 당국의 탄력이 무척 강합니다. 그리고 북한체제의 특성상 외부에서 들어오는 조언이나 지원에 대한 반감이 특히나 심하죠. 이것이 정책을 계획하는 사람에게도 중요한 사실이죠.
정말 북한 당국이 개혁이라는 말을 제 입으로 이야기하고 관련 조치를 취하게 되면 독일 비롯해서 EU 국가들이 도와주려고 날아올 것입니다. 더 쉽게 말씀 드리자면 김정은이 장마당에 나가서 할머니한테 쌀을 사는 모습이 로동신문 1면에 나가는 날에 독일도 훨씬 적극적으로 북한을 지원하려고 나설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명확한 증거가 나오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없으며 방향성도 애매하며 그 주체마저도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운 변화라는 요소를 어떻게 정책에 반영할 것인가? 나아가 이해한다 해도 그런 변화를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확대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바람직할까?
독일의 대북정책은 현실적 목표를 지향하며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설정
북한 문제가 고도로 정치화된 이슈가 아닌 독일에게 북한을 상대적으로 사고가 자유로운 환경에서 분석할 수 있는 장점이 있죠. 몇 년마다 흑과 백이 자리를 바꾸는 일이 없고 우리는 북한을 볼 때 항상 흑을 흑이라고 부르고 백을 백이라고 부르죠. 심지어 회색부분이 있다면 그것마저도 회색이라고 합니다.
저에게 주어진 정책적인 과제 중에 ‘통일을 이루라’는 것도 ‘평화협정을 협상하라’도 없습니다. 참 쉽고 부럽죠? 사실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 독일의 이해관계가 보편적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북한의 비핵화를 이루라’ 그리고 ‘북한의 반인도적 범죄를 중단시켜라’는 과제가 있습니다. 그런 만큼 독일에서도 대북 이슈가 해결이 거의 불가능한 중동평화문제나 아프간 평화문제와 비슷한 악명을 쌓았죠.
이 어려움을 조성하는 이유가 또한 모든 나라에게 비슷하죠. 정책의 대상이 한국에게도, 미국에게도, 독일에게도 똑같은 북한정권이죠.
저희가 평가하기에 현정권이, 제대로 된 개혁의지가 없는 상황에서 지속가능하며 대규모의 프로젝트의 동반자 되기에는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engagement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대북정책은 ‘협력해야 한다’도 아니고 ‘협력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협력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쉬운 것처럼 들리겠지만 어마어마한 결론입니다.
즉,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하여 꼭 북한과 손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동시에 북한과 손을 잡을 수 있는 프로젝트가 아예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프로젝트들을 통해서 정권이 이것을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 사고와 가치들이 많이 북한 내부로 이전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조건적으로 프로젝트를 늘려서 북한에 우리의 가치를 주입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다소 미온적인 정책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제가 표현해야 하면 그저 저희가 저희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현실적인 최선’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의 노력에 일부 긍정적인 변화들도 있었지만, 통일 이후 30년, 동독의 역사를 포함해서 지난 70년동안 북한과 교류한 결과 북한의 패션이 변했고, 북한의 경제가 변했지만, 북한의 정치 이데올로기적인 핵심요소들이 생각보다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변화는 어느 단계에 있다고 평가해야 합니까?
단계라는 말을 쓰게 되면 항상 무엇인가 이론이나 다른 사례에 기반한 일반화할 수 있는 과정을 연상케 하죠. 단계로서 건국, 성장기, 위기, 붕괴, 통일이라고 생각하면 바로 독일사례가 언급되죠. 독일사람이 한국에 있거나 한국사람이 독일을 방문할 때 흔한 독일통일 사례비교를 통해서 그 방법에 따라 좋은 교훈을 얻을 수도 있고, 북한문제 기본을 흐리게 할 수도 있죠. 그런 만큼 독일과 한국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잘 이해해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비교도 잘해야 합니다.
수 십년 동안의 비교연구에 의하여 명확히 드러난 것은, 손쉬운 1대1비교로 독일과 한국을 비교해서는 통일 문제도, 통일 이후의 통합 문제도 핵 문제도 인권 문제도 이해할 수 없으며 이러한 접근법으로 통하여 해결방안을 찾으려면 이것이 막다른 길에 불과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는 패턴이나 요소를 충분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또한 한국과 독일의 비교 사례입니다. 간단하게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독일의 케이스가 오늘의 주제에 잘 보여주는 것이 뭐냐 하면 주로 5가지로 봅니다. 다소 생소했으면 좋겠습니다.
1) 첫째, 장기적으로 교류를 지속적으로 하고, 정치적으로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기본 틀을 유지하면 장기적으로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확신을 갖고 정책을 실행하려면 일시적인 쇼보다 꾸준한 노력과 인내심을 가져야 합니다. 4년 안에 안간힘을 써서 새로운 단계의 관계를 만들려는 목표의식도 중요하겠지만, 일시적인 성공을 위하여 장기적인 안목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특정한 프로젝트나 합의를 갖고 이것이 성공적이었다고 자부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정말 성공적이었는지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둘째, 변화는 내부에서 시작되고 외부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만, 그 주체와 동력은 그 상황을 제일 잘 아는 내부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외부로부터의 Regime Change 혹은 Regime Engineering가 성공한 사례를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3) 셋째, 루마니아 차우세스쿠 정권은 24시간에 무너졌고, 1988년에 너무나 튼튼하고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동독도 불과 1년 뒤에 변화해야만 하는 상황에 봉착했습니다. 북한도 변화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무너질 것입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며칠 전에도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동독을 탈출했죠. 곧 자유가 온다는 것을 전혀 몰랐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례에서도 보듯이 나비효과와 비슷한 묘한 역사의 힘이 존재해서 역사가 갑자기 바뀌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제가 생각할 때 변화의 수준에 대한 절대적인 정보 부족 때문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역설적이지만 북한은 무너지기 직전까지 외부에서 보기에 안정됐다는 평가를 받겠지만, 북한 당국은 무너질 때까지 내부적으로 안정됐다고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4) 넷째, 북한이 동독사례를 보면서 결론 낸 것이 ‘개혁과 타협으로 나라가 망한다’는 것인데 그것이 잘못된 인식입니다. 북한이 동독사례를 보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 변화는 당국이 원하든 말든 일어날 것이지만, 체제도 변화해야만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정권도 사회적인 변화가 어느 정도까지 왔는가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하루빨리 행동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동독 정권이 개혁을 해서 무너진 것이 아니고, 당국이 개혁을 너무 늦게 해서 무너진 것입니다.
5) 다섯째, 이 모든 것들이 상호작용하기 때문에 1년 뒤든 10년 뒤든 희생자와 그 가족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상황만 되면 바로 물어볼 것입니다: 우리가 갇혀 있을 때, 우리가 목소리가 없을 때 너희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서독의 동독에 대한 인권정책이 명확했고 강경했지만, 더 적극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동독 독재의 희생자들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 자손들까지 이르러 아직도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 한반도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정책은 왜 중요하며 대북인권정책을 어떻게 할 것인가?
앞서 말씀 드렸듯이 독일사례는 주로 대북 engagement를 확대하는 근거로 제시됩니다. Engagement가 중요합니다. ‘북한 퍼주기’라며 인도주의적 지원이 비판을 많이 받지만, 그래도 engagement하려는 ‘아름다운 시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최소한 무관심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나 저는 나아가서 독일 사례가 더욱 더 적극적인 대북인권정책으로도 활용이 가능하고 많은 교훈을 내포하고 있다고 봅니다.
정책이 외교의 기본이고 대북문제를 풀려면 제일 중요한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분석을 바탕으로 자기 이해관계를 잘못 정의해서, 정책의 대상을 온갖 희망사항으로 정의해놓아서 정책을 계획하고 나중에 그 정책을 따르지도 않고 대상의 반응만 보고 행동하면 모든 것이 실패하기 마련이죠.
잘된 정책이 모든 분야, 모든 사안에 걸쳐서 작용될 수 있고 대상의 작은 움직임에 상관 없이 언제나 힘이 되는 가이드라인으로 됩니다.
몇 달 전에 제3국의 고위 관계자가 저에게 고백하듯이 다음과 이야기 했습니다. 다른 기관이 주체인 대북 안보정책과 자기가 맡은 인권정책이 자꾸 긴장관계에 있어서 혼란이 있다고.
그래서 저는 물어봤죠.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대북 안보정책과 인권정책을 같은 나라에서 계획하고, 같은 목표를 두고 같은 대상으로 하는데 어떻게 그 방향이 다를 수가 있죠?
너무나 많이 언급되는 말이지만, 너무나 정확한 말인 만큼 여기서도 말씀 드리겠습니다: 인권 없이는 평화도 없다. 인권이 없는 평화가 평화가 아니다.
한번 가치와 규범에 기반하는 대북정책을 설정하였으면 그 뒤에 모든 문제가 쉽게 결정됩니다.
– 북한이 불법행동을 하면 그것을 불법이라고 바로 규탄하고, 안보리에서 우리의 힘으로 이슈화하고 베를린에서 거의 자동적으로 북한대사를 초치할 수 있습니다.
– 북한주민이 북한을 탈출해서 독일에 오기 전에 그 어떠한 중대한 범죄를 저질러도 일단 난민신청 등 법대로 보호 받을 권리를 보장 받고 강제로 북송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 대북인권결의안을 그 어떠한 정치적 상황이나 고려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매해 공동 발의할 수 있습니다.
– 탈북자들이 애타게 제 3국에서 북송위기에 놓여 있을 때 큰 정책적 논의 없이 바로 우리 대사관한테 초지하도록 지시할 수 있게 됩니다.
– 제3국 국적자들이 평양에서 억류되면 다른 논의 없이 바로 외무성에 항의해서 석방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 국제무대에서 큰 나라들마저도 비핵화가 인권보다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행동을 보이면 우리는 우방 앞에도 우리의 실망을 금치 않습니다.
대북관계에서 인권을 중시하는 정책을 펼치면 효과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 프로젝트, 일부 면담이 취소될 수도 있죠. 그러나 사람의 생명이 걸린 문제에서 이런 것조차 감당할 수 없으면 대북관계를 왜 유지합니까? 이런 입장을 오래 유지하면 북한도 이를 이해하게 됩니다. 북한은 이제 독일의 대북정책을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초현실주의적인 나라인 만큼 북한에게 그럴 힘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북한도 우리의 북한 주민에 대한 관심이 진심이 어려 있는 관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도주의적인 지원을 한번도 끊진 않았고 대화의 문을 한번도 닫은 적이 없었으니 북한도 우리 독일이 대북정책을 그저 쇼를 하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신뢰’라고까지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지속적인 의견교환 통해서 불신이라도 최소화시켰죠. 북한 고위 관계자가 북한과 독일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다음과 같이 저에게 묘사했습니다.
“우리 공화국은 몇 년에 한번 와서 세상의 모든 보물을 한꺼번에 약속하는 손님보다 꾸준히 와서 작은 선물 하나 하나 갖다 주는 손님이 더 좋다.”
우리가 이렇듯 북한과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낮은 수준에서 유지하는 동시에 지난 몇 년간 우리에게 도움과 협력을 요청하는 인권단체나 개인들이 많아지는 것을 보니 우리 정부의 정책적 접근법이 적어도 완전 틀리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웨덴의 정책도 비슷하죠. 한편에 대화의 장소도 마련해주고 인도주의적인 지원을 많이 해주면서도 매년 자체의 대북인권보고서를 내고 북한 외교관의 불법행동에 대해서 엄격하게 대하죠.
프랑스 또한 그런 사례죠. 핵문제에 있어서 제일 강경하게 항의를 하면서 공식 외교관계도 없지만 평양에 협력사무소를 개설하고 프랑스어 교육에 있어서 북한에게도 많은 지원을 해주죠.
유럽나라 중에서도 각 나라가 대북정책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다 같은 분석에서 출발하고 같은 결론에 도달합니다: 북한이 변해야 우리에게 지속 가능한 파트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조건적인, 단기간적인 지원으로 북한이 바꾸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부에서 언젠가 그런 변화가 이뤄질 수 있도록 접촉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접촉에서 우리의 규범과 가치를 주저 없이 이야기 해야 합니다.
독일 대북정책의 첫 번째 목표는 북한주민들의 삶의 향상
비핵화하면 북한사람의 삶이 나아질 것이고, 경제개혁을 하면 삶의 질이 나아질 것이고, 인권이 증진되면 역시 나아질 것입니다. 즉 북한체제를 무너뜨리려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고, 일단 북한이 이미 내부로부터 진행되고 있는 변화를 제대로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책을 더 인민중심으로 펼치게 만드는 것이 우리 정책의 1차목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과정에서 인권이 더 존중되고 인민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북한체제가 더 오래 가면 그것은 일단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그저 혼란과 일시적인 불안정을 피하기 위해서 현 북한체제를 지지, 지원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현재 북한 체제의 결함에 대해서 침묵함으로써 국제사회의 북한에 대한 인식을 인위적으로 바뀌고, 일단 인식이 바뀌면 북한 당국도 결국에는 바뀔 것이라는 초구성주의적 접근법의 이론이 위험하다고 봅니다.
북한에 좋은 소리만 하면 그들이 과연 바뀔까요? 인간도 그렇죠. 어린아이가 계속 완벽하다 완벽하다 너무 똑똑하다 칭찬만 들으면 그 아이가 공부를 제대로 할 것 같습니까? 독일 속담에 ‘사람은 비판으로 성장한다’ 혹은 ‘제일 아픈 비판이 제일 고귀한 형태의 칭찬’ 이런 말들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북한을 제대로 비판하는 것이 북한을 돕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북한인권이 다른 나라의 외교에서 실종될 때마다, 비핵화 문제 속에서 침물 될 때마다 독일과 다른 유럽국가들의 목소리가 더욱더 커졌습니다. 그리고 북한도 그것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몇 년 전 고위 북한 당국 관계자가 저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안다. 너희들이랑 무엇이든 잘해보려면, 인권이라는 말을 꼭 읊어야 한다는 것을.”
저는 그저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말로 표현할 뿐이지만, 언젠가는 이해하게 되는 거죠.
분명하게 말씀 드리는데, 우리는 인권문제를 정치의 연장선에서 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비핵화 압박을 위하여 인권을 거론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인권이라고 말할 때 그것이 그저 인권을 의미합니다.
인도주의 협조는 어떻게 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인권과 직접 관련 있는 분야에 대해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인도주의적 협조 분야입니다. 우리 외교부에서 이 두 분야를 한 명의 특사가 담당하는 만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인권이 중시되지 않은 나라에서는 인도주의적인 협조에 대한 수요가 다른 나라보다 더 많고 더 자주 필요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권이 중시되지 않은 환경에서 인도주의적인 협조를 전달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경향도 있습니다. 전형적인 악순환이죠. 북한도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북한처럼 외국의 침략도 안 받고, 내전도 없고, 국가권력이 전 지역을 절대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나라에서 모든 것이 그렇게 부족한 것이 정권의 bad governance 때문이 아니면 무엇 때문인지 설명이 안 됩니다. 기후변화, 토지 등등 도 거론되지만, 그것이 주요 원인이 아니죠.
현지를 자주 방문해서 단체들과 많은 이야기를 하는 만큼 할 말이 많지만 다음 네 가지로 요약하겠습니다.
첫째, 자기 인민에 대해서 북한당국이 관심이 없는 상황에서 일부 지원을 해줘야 하겠지만, 그 댓가로 접촉과 모니터링을 요구해야 하겠습니다. 모니토링 편의상 북한사람이 맡아서는 안 됩니다. 국제사회의 모니터링은 심지어 전화로 이뤄진다는 사례도 적지 않습니다. 단언컨대, 내전이 심각한 시리아나 이라크에서도 모니터링이 이보다 더 쉽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둘째, 인도주의적인 협조에서도 프로젝트 하나를 잘한다 해서 북한 주민의 삶이 많이 좋아진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수많은 단체들이 30년째 활동하고 있지만, 북한의 영양상황마저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개발협조 등 대규모 지원은 북한이 바뀌어야만이 지속 가능할 것입니다.
셋째, 인도주의적 지원은 현지에 네트워크를 만들고 현지에서 계획하고 현지에서 이행해야 인민에게 전달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외부에서 그저 물자를 보내주는 방식은 현지에 나가 있는 단체들마저도 반대하고 있습니다.
넷째, 그런 상황일수록 인도주의적인 협조에서도 기본 원칙과 가치관, 그리고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합니다. 인도주의적인 협조를 잘 하려면 정치적인 의식이 살아 있어야 하겠지만, 인도주의적인 협조를 정치적 레버리지로 악용하려는 시도도 있어서 안 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해도 북한 당국이 우리의 협조를 필요에 따라 조정하고 자기 목표에 악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최대한 어렵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말씀 드린 것은 작지만 효과적인, 유럽이 할 수 있는 대북인권 및 인도주의 협조외교의 역할에 대한 소개였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독일의 한반도 담당자로서 쉽게 조언할 수 있습니다. 북한에 대한 이해관계가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덜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통일을 이미 겪었고 한반도 문제는 우리나라의 중요한 이슈 중 탑텐 안에 들지도 않습니다.
대북관계에서 이루려고 하는 것이 레짐체인지도 아니고 제3자의 Regime Engineering도 아닙니다. 내부에서 밖으로, 아래에서 위로 가는 진정한 인민 중심 Change in the Regime입니다. 이를 장기적으로 이루려면 북한을 상대로 인정하되 우리의 가치에 기반을 두는, 직설적이면서도 북한도 믿을 수 있는 engagement를 눈높이에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이론적으로 쉽지만 이행은 하루하루 전투와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도 다른 제3국의 정부들도 여러분들도 우리의 이러한 접근법에서 자기 상황에 맞게 작용할 수 있는 요소를 찾을 수 있으면 더 없이 기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