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주의, 프랜시스 베이컨의 햅틱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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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정자

 

-미술을 눈과 손의 관점에서 보든가, 아니면 시각과 촉각의 관점에서 보는 투 트랙이 가능하다

-몬드리안의 추상미술은 순전히 눈적인 코드를, 폴록의 추상표현주의는 순전히 손적인 공간을 

-베이컨의 그림은 손-눈 종속 없어. 원근법 없이, 시각이 촉각처럼 행동하는 햅틱. 색채로 구현

 

 

삼성이 스마트 폰을 처음 출시할 때 ‘햅틱’이라는 말을 키워드로 삼아서였을까? 별로 낯설지는 않은데, 그러나 <눈과 손, 그리고 햅틱>이라는 책 제목이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묻는 지인들이 가끔 있다. 사실은 이 짧은 한 줄의 제목 속에 서양 회화 전체의 역사가 담겨져 있다.

 

고전적인 그림이건 현대 회화이건, 색채와 형태가 그려진 사각형의 2차원적 공간을 우리는 재현의 공간이라고 한다. 캔버스 외부 세계의 현실을 그대로 재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화가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그린다. 그러므로 미술에서 눈과 손은 가장 기본적이고도 필수적인 수단이다. 눈은 우리의 감각 중에서 시각과 관련이 있고, 손은 촉각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미술을 눈과 손의 관점에서 보든가, 아니면 시각과 촉각의 관점에서 보는 투 트랙이 가능하다.

 

 

비잔틴 미술, Icon of Christ. 입체감 없이, 그저 평평하고 납잡한 평면성이다.

 

미술사를 한 번 간략하게 훑어보면 저 멀리 수 천 년 전 이집트 미술이 있고, 다음에 고대 그리스 미술이 있다. 서력기원 이후로 들어오면 중세의 비잔틴 미술과 고딕 미술이 있으며, 르네상스 시대에는 원근법적 회화가 있고, 그것이 19세기 사실주의 미술까지 지속되다가, 20세기에 이르면 모더니즘이 나오고, 추상화가 그 뒤를 이었다.

 

물론 오늘날에는 설치 미술, 미디어 아트 등이 나오면서 더 이상 캔버스에 그리는 평면화만을 미술이라고 하지는 않게 되었다.

 

고딕 미술. 눈이 쫓아오기 힘든 엉겅퀴 운동감 표현

비잔틴 미술에는 음영도, 명암도 없다. 따라서 그림에는 깊이가 없다. 인물에도 볼륨이나 입체감이 전혀 없어, 그저 평평하고 납잡한 평면성이다. 다시 말하면 촉각성이 없다. 비잔틴 미술을 시각적 예술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고딕 미술에서는 손이 눈을 지배한다. 손은 눈이 쫓아오기 힘든 속도와 격렬함으로 운동감을 표현한다. 고딕 미술을 ‘손적인 공간’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여하튼 눈과 손의 관점에서 보면 미술사적으로 재현의 공간에는 두 유형의 공간이 있다. 눈의 역할이 더 우세한 눈(眼)적 공간(optical space)과 손의 역할이 더 우세한 손(手)적 공간(manual space)이 그것이다.

 

눈적 공간에서는 손이 눈에 종속되었고, 손적 공간에서는 눈이 손에 엄격하게 종속되어 있다.

 

비잔틴 미술의 평면적 공간 안에서는 손이 눈에 종속되었고, 고딕 미술의 자유분방한 공간 안에서는 눈이 손에 종속되었으며, 르네상스에서 19세기 사실주의 회화까지의 원근법적 회화에서는 다시 손이 눈에 종속 되었다.

 

 

눈과 손의 두 방향의 종속관계는 현대 미술에서도 고스란히 다시 반복된다. 몬드리안의 추상미술은 순전히 눈적인 코드를 만들어냈고, 폴록의 추상 표현주의는 순전히 손적인 공간을 만들어냈다.

 

몬드리안의 그림에는 2차원의 기하학적 형태들만이 있을 뿐 손으로 만져질 듯한 촉각성은 전혀 없다. 그것은 순수하게 시각적인 공간이다.

 

잭슨 폴록은 솔, 비, 헝겊 조각, 혹은 스펀지로 작업하고, 손으로 물감을 뿌렸다. 마치 손은 독립을 쟁취한 것 같다. 전통 회화에서 손이 눈의 지배를 받았다면 추상표현주의에서 손은 완전히 눈을 제압했다. 추상표현주의를 손적인 미술이라고 규정하는 이유이다.

 

그럼 이 번에는 시각적, 촉각적이라는 코드로 회화사를 다시 보자. 비잔틴 회화는 시각적이고, 고딕 회화는 촉각적이며, 원근법적 회화는 다시 시각적이다. 그러나 원근법적 회화는 비잔틴 미술처럼 시각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고 촉각성이 가미되어, 엄밀히 말하면 촉-시각적(tactile-optical)이다.

 

“아니, 눈이 보고 손이 그리는 게 미술인데, 눈이 손에 종속되고, 손이 눈에 종속된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의문을 표할 것이다. 게다가

 

“미술은 눈으로 보고 감상하는 것인데, 당연히 시각적이지 촉각적이라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라고 말할 것이다. 거칠게 답해보면, 그림이 평면적이면 시각적이고, 입체적이면 촉각적이다. 이 대답에 의문은 더 깊어진다. 2차원의 평평한 평면 위에 그린 것이 회화인데, 입체적이란 또 무슨 말인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르네상스 미술, Titiano의 ‘Danae’

 

원근법이란 빛과 그림자를 강조하는 명암법, 색채를 서서히 짙게 또는 연하게 그리는 그라데이션 기법 등으로 화면에 고도의 깊이와 입체감을 주는 회화기법이다. 그리하여 2차원의 평면인 캔버스가 마치 안으로 쑥 파여 들어간 듯, 또는 액자 뒤로 3차원의 세계가 펼쳐지는 듯한 환영(幻影, illusion)을 만들어낸다.

 

티치아노의 다나에는 제우스 신이 황금 빗물로 변신하여 사랑을 나누었다는 그리스 신화 속 여인이다. 여인의 몸이 마치 손으로 만지면 포근하게 만져질 듯 입체감 있게 그려졌다. 명암, 모델링, 그라데이션 등의 기법으로 이런 입체감을 내는 것이 바로 원근법이다. 원근법적 회화를 시-촉각적 지각으로 규정하는 이유이다.

 

인체도 단순히 시각적으로 인지될 뿐만 아니라 조각적 혹은 촉각적 성질을 띤다. 초원에 누워 잠자고 있는 나체의 여신 다나에는 손으로 만지면 살이 포근하게 만져질 듯 볼륨감이 있다. 원근법적 미술을 촉각적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그러나 원근법이라는 방법 자체가, 생산이나 수용의 면에서, 엄격하게 우리의 시지각(視知覺)적 프로세스에 기인하는 것이므로, 원근법은 철두철미하게 시각적인 것이다. 그래서 원근법은 촉-시각적(tactile-optical)이다.

 

 

프래시스 베이컨, ‘루치안 프로이트의 초상’

 

그럼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은 눈과 손, 또는 시각, 촉각의 관점에서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베이컨의 그림에는 더 이상 어떤 방향으로도 손-눈의 종속관계가 없다. 그것은 눈적 공간도 아니고, 손적 공간도 아니며, 다만 ‘시각이 촉각처럼 행동하는’ 그러한 바라봄의 공간이다.

 

베이컨의 그림에 이르러 눈과 손은 더 이상 서로 종속됨이 없이 동등한 지위를 획득했고, 여기서 사용되는 우리의 지각은 ‘눈이 가진 만지는 기능’, 다시 말해 촉각적 기능이 덧붙여진 시각이다. 이것을 들뢰즈는 ‘햅틱’으로 규정했고, 햅틱은 색채에 의해 구현된다.

 

눈이 가진 촉각적인 기능, 이것이 바로 들뢰즈가 햅틱이라고 이름 붙인 새로운 지각이다. 쉽게 말하면 거기에 원근법이 없다는 의미이다. 추상화처럼 완전히 아무런 형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형상은 있으되, 그러나 그 형상이 현실의 재현은 아닌, 내적 감각의 드러냄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철저하게 색채에 의존하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원근법이 명암법 등의 광학주의(luminism)라면 베이컨의 햅틱 회화는 철저하게 색채의 조율에 의존하는 색채주의(coloris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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