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살해범을 아버지로 모시는 민주당(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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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종화 전국시설관리노동조합 조직국장

 

-1945년 한민당과 1955년 민주당은 뭐가 다른가? 10년의 역사 버린 환부역조(煥父易祖)

-한민당의 1대 당수격인 송진우와 2대 당수격인 장덕수를 암살한 배후에는 김구가 있었다

-김구, 이승만 김성수 등을 “구차한 안일 위하여”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매도

 

 

기업에서 회계를 분식(粉飾)하여 ‘사기’를 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디 기업만이겠는가. 인간사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분식, 정확히는 거짓말 혹은 사기를 치는 경우는 왕왕 있는 일이다. 정당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경우는 아버지 대신 작은아버지 정도로 바꾼 게 아니라 아버지를 죽인 사람을 아버지로 바꾼 경우이다.

 

2018년 2월 18일 민주당 산하의 민주연구원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행한 역사지만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정당으로는 한민당, 자유당, 유신공화당, 민정당, 새누리당 등으로 이어진 반민주, 매국, 친일, 분단, 냉전 노선 세력에게는 대한민국의 가치인 진정한 민주, 진정한 애국이 존재하지 않지 않았나 생각한다.”

 

즉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이 민주당의 전신이 아니라 자유한국당의 전신이라는 것이다.

 

2019년 현재 민주당은 1945년 한민당의 후신임은 역사적으로나 인적구성, 이념 등 어떤 면을 보더라도 명확하다. 이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보편적인 상식일 것이다. 하지만 지난해 초 민주연구원장의 발표는 일회적인 차원의 발표가 아니라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공식적인 발표였다. 스스로도 “전국을 돌며 대한민국 민주주의 뿌리 강좌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현재 민주당 홈페이지도 1955년 민주당을 정당의 출발점으로 명시하고 있다. 민주당이 한민당을 전신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음은 명백하다.

 

1945년의 한민당과 1955년의 민주당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왜 굳이 10년의 역사를 버린 것인가? 이 환부역조(煥父易祖)의 주체는 누구인가.

 

 

송진우는 1945년 12월 29일 밤부터 30일까지 있었던 경교장 토론에서 김구의 강경반탁에 “신탁통치안 원본이라도 보고 결정하자”며 신중론을 주장했다

 

그들은 현재 586이라 불리는 80년대 운동권세력이다. 보통은 친노, 현재는 친문이라 불리는 세력이다. 필자는 이 세력을 (반미)민족주의자들이라고 규정한다. 보편적인 평가는 아닐지라도, 필자가 스승으로 생각하는 주대환과 그의 동지들의 일관되고 오래된 주장이다.

 

보수세력은 586세력을 보통 좌파, 빨갱이, 친북, 종북, 공산당 등등으로 생각하고 있다. 물론 그런 면도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통진당의 후신인 민중당과 정의당내 NL(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론.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회의에서 채택된 반파시즘 인민민주주의 혁명론을 모택동이 파시즘 대신 일본 제국주의로 이름을 바꾸고, 김일성이 주체사상으로 이름만 바꿔서 계승한 것이다) 계열들은 특히나 그렇다.

 

하지만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했고 현재 집권하고 있는 민주당의 586세력을 공산주의로 분류하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다. 정확히 본다면 김구의 민족주의로 규정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여기서 말하는 김구는 1945년 이전 레닌이 지원해준 돈 분배 문제 등으로 공산주의자를 죽이고 또 자신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피격 당했던 김구가 아니라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하여 김일성과 연대했던 김구를 말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민주당의 586세력은 공산당은 아니지만, 북한 공산당과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이념을 넘어 즉 북한주민의 인권보다도 북한 공산당과 연대, 통일을 우선시하는 세력이라고 봐야한다. 그러하기에 미국과 일본 등의 우방은 적대시하고 북한 공산당, 중국 공산당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1955년의 민주당은 한민당의 후신인 민주국민당(민국당)과 자유당 탈당파 등을 흡수한 당이다. 인적구성이나 이념 등에서는 거의 차이가 없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이 있다. 이것이 1955년 이전 10년을 버리는 이유이다.

 

그것은 바로 1955년부터 민주당은 야당이 된 것이다. 좋게 표현하면 이승만정부에 대한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시작한 것이다. 또한 1955년은 김성수가 사망한 해이기도 하다. 즉 현재의 민주당은 자신들의 역사에서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하나인 김성수, 대한민국의 기초를 놓은 경성방직과 고려대학교, 동아일보를 만든 대한민국 부통령 김성수를 지우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김성수는 이승만과 조봉암이 주도하던 농지개혁에서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지주임에도 대세를 인정하고 결사반대는 하지 않아 세계사적인 농지개혁의 성공 사례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독립국 중 유일하게 선진국에 진입한 대한민국의 기초가 되엇다. 그럼에도 문재인 정권은 2018년 김성수의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취소했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릴 수 있는 사람은 이승만(미국 독립운동세력), 김성수(국내 지도층 세력), 신익희(중국 임시정부세력), 조봉암(공산당 세력) 등으로 볼 수 있다.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회라는 직계 조직이 있었고, 김성수는 한민당, 신익희는 임시정부 출신이었다.

 

신익희는 김구의 제헌의회 보이콧에 반대해 출마하여 제헌의회 2대 국회의장을 맡는다. 제헌의회 초대의장이 이승만이니 사실상 초대 국회의장이라 볼 수 있다. 조봉암은 공산당 출신이지만 전향하여 국회부의장,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농지개혁을 통해 대한민국 발전의 초석을 놓았다.

 

신익희는 민주당에 합류하였고, 조봉암은 억울하게 법살당해 진보당의 명맥이 끊겼으므로 세력으로 본다면 대한민국 건국의 주된 두 세력은 이승만(독립촉성중앙회)과 한민당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한민당이 대한민국의 건국 주도세력임이 분명하고 의석의 20% 남짓이기는 하지만 제헌국회와 2대국회의 제1당이었고 1955년까지 연립여당 정도로는 볼 수 있다. 이렇게 한민당의 존재감이 분명한데도 현재의 민주당이 이를 굳이 자신의 계보에서 삭제하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현재 민주당은 대한민국 건국세력임을 부정하고 싶어서이다. 한민당의 정통성을 부정하기 시작한 것은 노무현 정부 시절로, 이때부터 민주당 내에서 전통적인 김대중 세력을 몰아내고 586세력이 주류가 되기 시작했다.

 

1955년 이전 10년의 공백을 김구의 한국독립당(이하 한독당)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것이 586 민족주의세력이 추구하는 목표이다. 그럼 한민당과 한독당은 우당인가? 물론 같은 우파정당으로 통합노력도 있었다. 하지만 한민당의 1대 당수격인 송진우와 2대 당수격인 장덕수를 암살한 배후에는 분명히 김구가 있었다.

 

혹여 필자가 이 글로 김구기념사업회나 민족문제연구소 등에 의해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한다면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그 어떤 대가도 치를 각오가 돼있다.

 

송진우는 1945년 12월 29일 밤부터 30일까지 있었던 경교장 토론에서 김구의 강경반탁에 “신탁통치안 원본이라도 보고 결정하자”(당시는 언론보도로만 알고 있을 때였다)고 일종의 신중론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암살된 것이다. 송진우도 신탁통치에는 반대함을 밝혔다.

 

다만 임시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행정권을 즉시 접수하고 미군정에서 일하고 있는 공무원들에게 군정을 거부하고 임정의 명령을 따르도록 하는 사실상의 ‘쿠테타’에 반대했을 뿐이다. 미국을 적으로 돌리면 공산당이 어부지리를 얻는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송진우의 판단은 지극히 합리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즉시 한현우 등 6명에 의해 암살되었다.

 

일반적으로 경교장 토론은 29일에 있었고 암살은 30일이니 다음날 암살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정확히는 30일 새벽 4시까지 경교장 토론이 이어졌고, 집으로 가자마자 30일 새벽 6시 15분에 암살된 것이다. 불과 2시간 후였다. 당시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주요정당의 지도자였던 송진우를 암살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가진 세력은 임시정부계밖에 없었고 그 지도자는 김구임이 분명하다.

 

한현우는 “좌파에서는 여운형, 우파에서는 송진우를 죽이려 했고, 여운형, 송진우가 미국의 후견을 지지한 것이 저격동기였고 김구와 이승만이 의거로 칭찬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하지 미군청장과 조병옥 미군정청 경무국장(경찰총수), 장택상 수도경찰청장 등 뿐만 아니라 80대 운동권에게 6.25사변에 대해 미국의 ‘유도 남침설’을 주장해 큰 영향을 준 브루스 커밍스도 김구를 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봤다.

 

장덕수는 1947년 12월 2일 암살되었는데, 이때는 한독당과 한민당의 합당에 김성수는 찬성했지만, 장덕수는 반대했기 때문에 김구와의 갈등이 심각했을 때이다. 암살자는 박광옥 등 5명이었고 이들 모두는 한독당 당원들이었고 임시정부, 한독당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즉 김구와 신익희의 지도하에 있었던 테러단체 백의사의 관련자들이다.

 

더구나 김구는 1948년 3월 미군정 하에서 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로 재판까지 받았다. 장덕수의 암살로 한민당과 한독당의 합당은 무산되고, 김구는 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함으로서 이승만과도 결별하게 된다.

 

이로서 1947년 11월 건국에 찬성하는 이승만의 입장에 동조하던 김구는 1948년 2월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란 제목으로 건국반대 성명을 발표한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 하겠다.”

 

즉 김구는 이승만, 김성수, 신익희, 조봉암 등을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매도한 것이다. 더구나 한민당은 김구와 임정계를 일제시대 악명 높은 사교집단인 백백교에 비유해서 “살인마의 조직과 명령 계통을 근절하라”고 촉구까지 한 바 있다.

 

김구는 신익희, 염동진으로 이어지는 명령체계를 갖춘 백의사를 통해 송진우와 장덕수 뿐만아니라 여운형 등도 암살했고 1946년 2월 김일성 등 북한 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공격도 했었다. 백의사는 다른 청년단과 약간 성격을 달리한다.

 

서북청년단(북한 공산당의 토지개혁에 반대한 지주와 공산당의 종교탄압에 월남한 기독교인 등으로 구성된 단체)이나 김두한(조직폭력배), 이철승(학생운동세력) 등으로 알려진 우익 청년단은 비밀리에 요인을 암살하는 단체라기보다는 남로당 무장 세력과 패싸움을 벌이고 남로당 등에게 공개적이고 대중적인 방식으로 집단 폭행을 가하는 백색테러단체였다.

 

이철승도 민주당의 주요 정치지도자였고, 조직폭력배로 유명한 김두한도 1967년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신민당, 민주당의 여러 이름 중 하나) 후보로 출마했었다. 사실 김두한은 한국노총의 간부로, 개인적으로는 노동운동의 선배로 생각한다.

 

이승만은 기독교인으로 미국식 민주주의에 정통해 심지어 1945년 이전의 일본인 및 친일파 처단에도 적극적으로 찬성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1908년 미국인 친일파 스티븐슨을 처단한 전명운, 장인환 두 의사의 변호조차 거부했다. 또 조봉암을 암살하지 않고 대법원 판결로 법살했다.

 

이는 이승만을 옹호하고자 혹은 폄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승만은 객관적으로 테러와는 분명 거리가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알리고 싶어서 하는 말이다. 1949년 김구의 암살도 이승만에게 과잉 충성하려던 김창룡 등의 소행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승만의 직접 지시는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2019.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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