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르담 대성당과 ‘피의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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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정자

 

-프랑스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었던 16세기 종교전쟁 그린 영화 ‘마고 여왕’

-신구 교도 갈등 봉합하고 화합 도모하려던 정략결혼이 살인과 약탈, 강간과 방화로 번져

-앙리 4세, 신교 버리고 구교 선택. 종교의 자유 보장한 낭트 칙령 선포해 종교전쟁 종식

 

 

불에 탄 노트르담 대성당을 보니 이사벨 아자니(Isabell Adajni)가 주연을 맡고 파트리스 셰로 감독이 연출한 영화 ‘마고 여왕(Queen Margot, 1994년)’이 생각난다. 프랑스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었던 16세기 종교 전쟁(1562~1598) 이야기다.

 

열아홉 살 마르그리트(Marguerite, 1553~1615) 공주는 동갑내기인 나바르 공국(公國)의 앙리 왕자(Henri de Navarre 1553~1610, 나중에 앙리 4세가 된다)와 1572년 결혼한다. 공주는 구교인 로마 가톨릭교도이고, 신랑은 당시 위그노 파(派)라고 불리던 신교도였다. 고질적인 신구 교도간의 갈등을 봉합하고 종교적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기획된 정략결혼이었다.

 

결혼식은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열렸다. 신교도인 신랑은 가톨릭 성당인 노트르담 성당에 당연히 들어갈 수 없어, 결혼식 미사가 거행되는 동안 성당 밖 광장에 서 있었다고 한다. 공주의 오빠이며 당시 왕이었던 샤를르 9세가 공주의 머리를 뒤에서 밀어 고개를 끄덕이게 함으로써 결혼 서약을 했다는 이야기가 야사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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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적셔진 흰 웨딩드레스가 상징하는 것.

이 야사는 나중에 앙리 4세와 마고 여왕의 결혼 취소를 정당화해주는 근거가 되었다고 한다. 신구교의 화합이라는 애초 목적과 달리 이 결혼식은 피의 결혼식이 되버렸다. 신교도인 왕자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전국에서 파리로 운집한 저명하고 부유한 신교도들을 구교도들이 무차별적으로 살해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572년 8월 24일 새벽, 성당의 종소리와 함께 살인자들이 일제히 행동을 개시했다. 신교도인 콜리니 제독이 가장 먼저 살해되었고, 몇몇 광신적인 사제들의 부추김과 함께 광기(狂氣)는 순식간에 파리 전역으로 번졌다. 살인과 약탈, 강간과 방화가 사흘 동안 계속됐다. 왕의 명령도, 법의 권위도 파리 시민들의 광기 앞에선 무력했다.

 

“센강 쪽으로 내리막을 이룬 골목길마다 마치 폭우라도 쏟아진 듯 피가 급류처럼 흘렀다.”

 

당시 방위군 총사령관의 회고였다.

 

피로 물든 결혼식 이후 더 깊은 증오와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이어졌다. 지방으로 퍼져나간 학살의 비극은 석 달 동안 계속됐다. 전국에서 1만~1만4000명의 신교도들이 구교도들에 의해 희생됐다. 신교도들만 죽은 게 아니라 많은 가톨릭교도들도 평소에 개인적 원한을 가졌던 이웃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후 프랑스는 내전에 돌입하여 30여 년 동안 신교도와 구교도가 서로 죽고 죽이는 끔찍한 살육전을 벌였다. 전투, 약탈, 무질서, 기근이 전국을 강타했다. 어느 진영도 물러서지 않았다.

 

파리의 신교도 대부분이 죽음을 맞았지만 새신랑 앙리 드 나바르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가톨릭으로 종교를 바꾸고 연금(軟禁) 상태에서 불안한 삶을 이어가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발루아(Valois) 왕가의 마지막 왕인 앙리 3세(Henri Ⅲ)가 후사(後嗣, 대를 잇는 자식) 없이 사망하자 가장 가까운 혈족인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이다.

 

왕으로 등극하여 앙리 4세가 된 그는, 자신의 종교인 신교를 양보한 채 스스로는 구교를 선택하면서, 신교도들에게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줬다. 이것이 그 유명한 낭트 칙령(1598년)이다. 이로써 앙리 4세는 프랑스 역사에서 종교 전쟁을 종식시킨 성군으로 추앙 받는다.

 

결혼 초부터 앙리 왕자와 마르그리트 공주는 사실상 남처럼 살았다. 어머니 카트린 모후가 사망하고 앙리 왕자가 앙리 4세로 등극(1589)한 뒤에도 둘은 이혼 조건을 둘러싸고 10년간 싸웠다. 결국 둘은 1599년 ‘마르그리트의 왕비 신분 유지를 인정한다’는 조건 아래 26년간의 형식적인 결혼 관계에서 벗어났다. 이듬해인 1600년 앙리 4세는 22살 어린 25세 신부를 맞아들였다.

 

파란만장한 마고 여왕의 이야기는 ‘피의 결혼식’이라는 주제로 게임이나 영화의 단골 소재가 되고 있다. 이사벨 아자니가 빨간 피로 적셔진 흰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 장면이 이 주제를 가장 전형적으로 압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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