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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순철
-제갈량 조조 유비가 청소년기에 책상에만 앉아 맹자왈 공자왈 공부만 했을 모범생들이었을까
-실제 사업을 하면서 경험을 정리, 시행착오와 반성의 경로를 통과하면서 공부한 경험주의자들
-제갈량은 법가 재상의 계보에 넣으면서 소하 같은 후방행정의 달인으로 재평가하는 것이 적절
나는 경험주의 인식론을 신뢰합니다. 그 오래된 기원은 부처님의 ‘와서 검증해 보라’입니다. 가장 최근의 사례는 ‘실천을 통해 유용성이 검증된 것이 진리’라는 존 듀이의 미국식 경험주의 명제입니다.
존 듀이의 철학을 실용주의나 도구주의라고 번역하면 단박에 동도서기와 같은 단어로 빠집니다. 동양의 정신이 서양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인데, 잘못된 사유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동양에도 경험주의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나는 제갈량을 그런 계보에 넣고 싶습니다. 삼국지에서의 제갈량 찬양과 달리, 실제 그는 청소년기에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조조나 유비도 그런 스타일이었다고 하더군요. 이런 사례를 어떻게 봐야 합니까.
그들은 실제 사업을 하고 현장에서 부딪히면서 체험을 정리하는 가운데 공부가 이루어졌습니다. 전형적인 시행착오와 반성을 통한 학습이라는 경로입니다! 이 점에서 경험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임용한 선생이 이런 점을 제대로 짚어냅니다. 삼십육계에도 포함된 공성계 같은 계략이 사실은 실제 사례가 빈약한 가운데 지어낸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실제 사건에서 사례가 형성되거나 역사에 기록된 사례의 연구에서 나온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겁니다.
나는 36계 중 32계인 공성계가 거의 허구에 가깝다고 봅니다. 나아가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물리쳤다’는 고사성어도 지어낸 이야기로 짐작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갈량은 마속을 잘못 기용해서 대업을 망쳤지만 사마의는 결코 대업을 망치는 수준의 잘못된 기용 사례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사마의가 최종 승리자인 이유입니다. 그가 제갈량의 나무상을 보고 도망칠 정도라면 어떻게 싸움에서 승리했겠습니까?
제갈량은 군략가라기보다는 아주 뛰어난 행정가였다는 것이 임용한 선생의 결론입니다. 게다가 극히 엄격한 법가 정치인이었습니다.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사천성(촉나라)을 다스리려면 법 적용을 엄격하게 하면서 공정해야 했습니다.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사천성(촉나라)을 다스리려면 법 적용을 엄격하게 하면서 공정해야 했습니다. 이 점에서 제갈량은 매우 뛰어난 법가 계통의 개혁가였음이 드러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생각이 이어집니다. 춘추시대의 ‘예’로서 더 이상 다스릴 수 없는 전국시대가 개막되면서 ‘법’으로 다스리는 사회적 전환이 이루어졌다고 말이지요.
유가의 이상은 조선 말의 꽉 막힌 성리학자와 오늘날의 사회주의자와 유사한 맹자에 의해 좌절되었습니다. 위문후의 뛰어난 법가 개혁가인 이회가 바로 공자 문중의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특히 공자는 다른 사람도 아닌 전국시대 초기의 가장 빠른 법가 개혁가인 자산을 매우 존경했습니다. 자산은 그야말로 전국시대에 어떻게 국가를 통치해야 하는가 하는 그 이상적 본보기를 보여준 캐릭터입니다.
자산은 미병의 시기에 활약했습니다. 춘추시대의 마지막 국면이 남북지투의 휴전 혹은 평화협정으로 미병의 시대가 40년 지속되었습니다. 오월동주의 쟁패전이 남쪽에서 벌어지고 북방이 잠시 평화로운 가운데 자산의 개혁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공자는 자산을 존경했기에 그의 문중에서 이회와 오기 같은 법가 및 병가를 아우른 뛰어난 인물들이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인물의 계보에 당연히 유비가 포함됩니다.
유가는 오직 성품으로서 ‘인’만을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법가의 측면도 내포했는데 맹자를 거치면서 크게 뒤틀려버렸습니다. 유비라는 캐릭터가 유가의 이상에 맞는 인물로 얼마나 왜곡되어왔는지 미루어 파악해볼 수 있는 지점이지요.
유비는 유약하고 온유한 군자이기에 앞서 카리스마있는 리더였고 아울러 오기와 같이 병가의 측면도 보유했던 인물입니다. 그랬던 까닭에 별도로 군략가가 필요치 않았습니다. 따라서 유비, 관우, 장비가 살았던 시점에서는 제갈량이 유방의 후방기지 책임자였던 소하처럼 일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법’의 시대가 도래한 전국시대 초기, 위문후의 재상 이회를 잇는 기라성 같은 법가 재상들이 등장합니다. 가장 빠르게 나타난 이가 바로 정나라의 자산이었습니다. 이어서 위나라 이회, 진나라 상앙과 범저와 이사, 촉의 오기, 한나라 신불해, 촉한의 제갈양, 한나라 소하, 위나라 순욱, 전진의 왕맹, 송나라 범수, 명나라 유백온, 청나라 범문정가 계보를 잇습니다.
모두 유사한 법가들인데 이것이 중국사의 결정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자유라는 것을 도무지 생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대륙국가라는 지정학의 저주 탓이라고 말하기야 쉽지만, 관중의 어떤 측면이 충분히 개화하지 못했던 까닭입니다. 위의 열거된 법가 재상의 계보에 관중을 넣지 않습니다. 관중이 아니라 대신 포숙이 법가 재상의 계열에 오릅니다.
관중은 오늘날 미국 대통령 트럼프 같은 캐릭터로, 욕망의 실현에 있어 장애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반면 포숙은 스스로 절제하는 엄격한 인물이었습니다. 칼뱅보다 선악시비가 더 강렬한 맹자같은 캐릭터였지요. 그러하기에 관중을 발굴해서 키우며서 공진화한 캐릭터를 갖추게 됩니다. 스스로도 본인의 한계를 잘 알았던 듯합니다.
오늘날 문재인 정부에 한계를 아는 포숙아 같은 사람이 있다면, 이명박 전대통령을 가두지 않았으리라 봅니다. 역아와 수초를 곁에 두면 안된다고 조언한 두 캐릭터가 포숙아와 관중입니다. 오늘날 관중 같은 캐릭터는 트럼프나 미 재무장관 스티븐 므누신 같은 사람이라고 여겨집니다.
제갈량은 법가 재상의 계보에 넣으면서 동시에 소하와 같이 후방행정의 달인으로 재평가하는 것이 가장 옳습니다. 임용한 선생이 말한 한 가지 이유에 하나를 더 추가해서 말하자면 제갈량을 군략가의 계보에서 빼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 첫째 이유로는 임용한 선생이 말씀하셨듯이, 위연에 대한 이상한 편견이 그의 과감한 위나라 공격계획을 막았다는 것입니다. 공성계와 같은 기묘전략을 구사하는 캐릭터가 촉나라 전군을 이끌고 위나라 공격에 나섰을때는 정말 꽉막힌 모범생처럼 굴었습니다. 위연의 제안을 너무 위험한 모험으로 보았습니다.
두 번째 이유로는 기산의 공격을 위한 호로곡 방어를 위해 마속을 기용한 것입니다. 마속은 전국시대 조나라의 뛰어난 장수였던 조사의 아들인 ‘탁상 군략가’ 조괄을 연상시킵니다. 경험으로 배우지 않고 책을 읽고 외워서 얻은 배움과 과장하는 캐릭터가 어울려서 최악의 결과를 낸 것입니다.
만일 제갈량이 정말 뛰어난 군략가였다면 위연을 중하게 기용하고 마속은 후방 참모업무를 맡기는 것이 옳았습니다. 촉한에 인재가 없었던 탓이 가장 크기는 하지만 위 두 가지 이유로 제갈량을 거의 신출귀몰의 군략가로 평가하는 것은 오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