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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 밖은 위험하다”
¶글쓴이 : 정아재
-3개월 치 식비 투자한 전단 5천 장, 와신상담의 재료로, 씁쓸한 우울의 통로로 따라다녀
-프락치를 거르지 못해 당했다는 사실 너무 후회. 믿고따른 친구와 후배들에게 너무 미안
-독재, 전체주의, 강압 등 이미지의 상속자는 386과 유사 386에 이어지는 운동권세력들

학생회장 선거에 선본 유니폼은 기본이고 유세차를 동원하는 일도 있었다.
총학 선거 투표 거부 운동의 실패는 내게 쓰라린 상처를 남겼다. 없는 형편에 3개월 치 식비를 투자한 전단은 5,000장의 이면지가 되어 내 방구석에 씁쓸하게 쌓여 있었다. 이후 내가 서울 생활을 정리할 때까지 그 이면지들은 나를 따라다녔다. 때로는 와신상담의 재료로, 때로는 씁쓸한 우울의 통로로, 때로는 유용한 연습의 도구로.
그 이면지들처럼 이때의 충격도 나를 따라다녔다. 프락치를 거르지 못해 당했다는 사실이 너무 후회됐고, 나를 믿고 따른 친구와 후배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이 사건 이후 나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름을 분명히 기억하는 당시의 동지들에게 먼저 연락 한 번 하지 못했다.
힘없는 민초가 거대 권력을 어떻게 이기겠느냐마는, 당시까지만 해도 나는 ‘민중의 힘’에 대한 기대가 남아 있었고. 프락치의 교란 정도는 충분히 예상됐던 일이었기 때문에 후회가 컸었다.
프락치의 교란 정도가 충분히 예상된 일이었던 것은, 겨우 스무 살짜리가 세상을 잘 알았다거나, 궁중 암투물 작가를 꿈꿨기 때문은 아니었다. 내가 총학선거 투표 거부 운동을 준비하면서 받은 여러 제보와 이야기들 때문이었다. 대충 이런 얘기들이다.
당시에는 일반 사회의 정치로 치면 정당에 해당하는 여러 선본(선거운동본부)이 있었는데, 주류 NL 선본과 주류 PD 선본 외에도 마이너 선본들이 있었다. 우리 학교는 NL이 압도적이지 못했던 학교였기 때문에 주류 NL 선본에서는 표가 갈라질 것을 우려해 마이너 NL계 선본의 선거 출마 자체를 견제했다.
좋은 말로 견제지, 그야말로 힘으로 찍어 눌렀다는 게 맞는 얘기다. 선거에 출마하려면 일정 수 이상의 추천인을 확보해야 하는데, 그 추천인 확보 과정에서 훼방을 놓은 것이다. 보통 추천을 해 줄 정도의 참여를 하는 아이들은 과방에 출입하거나 과 학생회 활동을 하는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그 아이들을 미리 포섭하는 경우는 양반이고, 그 아이들에게 선배와 조직의 권력을 이용해 비주류 선본에는 서명을 못 하도록 협박을 하는 일이 횡행했다.
비주류 선본에 직접 출마 포기를 협박해 강요한 사건도 있었다. 심지어는 물리력으로 추천 용지를 강탈하기도 했었다. 이런 사건들의 현장은 당사자의 증언으로 들었지만, 그 중 두 명의 비주류 선본 후보가 분함과 설움에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나는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그래, 민주화 투쟁을 한다는 놈들이 하는 짓들이 이런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역사를 모르는’ 후세대가 화면상에 포장된 이미지만 보고 추종하는 그들의 민낯이다. 사실 유시민 전 장관의 프락치 사건만으로도 이성이 있다면 충분히 그들의 평소 행동이 어떠했을지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씁쓸하게도 실체와 상관없이 포장된 이미지 덕에 오히려 그의 항소이유서를 명문으로 꼽는 게 현실이다.
대중의 인식은 그렇더라도 당시 운동권과 대립하며 내가 겪은 일들을 떠올려도, 그들이 정권을 차지하고 지금 행하는 행태를 보더라도 군사독재 정권의 혼을 가장 많이 물려받은 유신의 후예는 아무리 생각해도 386과 유사 386에 이어지는 운동권 세력이다. 독재, 전체주의, 강압…. 이 모든 이미지의 상속자는 그들이어야 한다.
이 당시 들은 얘기는 아니지만, 한 가지 사례만 더 얘기해보겠다.
지방에서 편입하여 온 학형이 있었는데, 그도 금수저 운동권에 상당한 반감을 보이길래 사연을 들어보니. 처음에는 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했는데 본인의 출신교에서는 보통 수천만 원 정도의 선거자금을 썼고, 그 돈을 집에서 후원하여 자비로 조달 가능한 정치 꿈나무 지역유지 아들이 학생회장이 됐다는 얘기다.
당시쯤에는 우리 학교에서도 이미 학생회장 선거에 선본 유니폼은 기본이고 유세차를 동원하는 일도 있었으니 상당한 비용이 들어가는 것은 뻔하였다. 이 돈이 공식적으로 학생회에서 정치자금으로 후원되는 일은 아니었으니, 일반 학우 몇 명이 모여 선본을 결성하는 수준으로는 도전하기 어렵게 만드는 금전적 진입장벽이 높은 셈이었다. 전액 지역유지의 사비로 이뤄지는 구조는 아니라 할지라도, 서민 자녀들에게 장벽이 있는 점에서는 서울이라고 별다르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과정을 겪고 난 뒤 나는 이후 운동권 세력과 직접 대립하지는 않았다. 요새 같으면 방구석 전파 전사가 한 번 나다녀 보니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인식이 생겼다고 했을 것이다. 이후 군대를 다녀오고, 복학하여 졸업을 준비하면서 실제로 생활이 무척 바쁘기도 했다. 건강도 많이 안 좋았고. 5,000장의 이면지를 한 번씩 바라보며 눈앞에 닥친 현실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이유야 어쨌든, 말하자면 비주류 좌파로서 투쟁하는 길을 포기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좌파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인권 운동가로서의 의식은 또렷했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독자적 대안 좌파 정도라고 해 두자.
<이어서 읽기>
어느 고첩 이야기#1 주체적 의식화
어느 고첩 이야기#2 순수의 시대(1)
어느 고첩 이야기#4 의심의 씨앗
어느 고첩 이야기#5 실패한 혁명
어느 고첩 이야기#8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2)
어느 고첩 이야기#9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어느 고첩 이야기#10 Mein kleiner Kamp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