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D.C.의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방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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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재원

 

-갑신정변으로 멸문당한 서재필 선생이 이주해 살해 위협과 굶주림 속에 머물렀던 곳

-자기 가족을 모두 죽인 대한제국 공사관을 바라보며 서재필 선생의 심정은 어땠을까

-보고 싶었던 것은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그런 것들은 하나도 없었다, ‘한국’은 없었다

 

 

한국에서 이미 워싱턴 D.C.의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에 대해 자주 들어 알고 있었지만 내가 방문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았었다. 건축가들도 문화유산 분야 전문가들도 모두 이 건물의 복원과 의의를 자랑스러워했다.

 

자전거로 로건 서클을 지나면서 건물 외관은 자주 보고 지나쳤었다. 그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에 오늘 처음으로 다녀왔다. 고종의 자강 외교, 1887년 조선이 초대 주미 전권 공사로 박정양을 파견한 것, 고종의 어진을 ‘모시고’ 황제가 계신 궁궐 방향으로 망궐례(望闕禮)를 올리던 ‘정당’이 미국에 파견되어 근무하는 공사관원들에게 가장 특별한 의미를 갖는 공간이었다는 설명을 들었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태극기는 조선의 국기이다. 태극기는 중국의 우주관에 입각한 주역의 궤를 통해 양명학으로 전환한 중국이 인정해 주기를 바라며 어필하기 위해 급조한 대한제국의 국기이다. 태극 문양은 중국 사신이 올 때 영은문으로 달려 나간 조선 왕이 사용하던 태극 문양을 모티브로 차용한 것이다.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은 조약의 문안 작성에도 체결에도 그 어떤 ‘대한’국의 자발적 의지와 판단을 결여한 채, 고종과 민씨 척족에 의해 열강들의 이해 관계를 다투게 되는 혼란스러운 대한의 정국을 관리하기 위한 청나라의 전략 관리 방안의 하나였다.

 

고향 잃고, 나라 잃고, 조국의 땅을 떠나 망향과 뼈가 접지른 전치 속에서 가장 뜨겁고 절실하게 자신의 조국을 갈구하던 이들이 상상하고 꿈꾸고 그려넣어 불어넣고 싶은 독립이라는 꿈이었을 것이다.

 

갑신정변 쿠데타로 삼족을 멸당한 필립 제이슨 씨(서재필 선생)가 희미한 목숨의 가느다란 실을 타고 일본으로 도주해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와 워싱턴D.C.까지 이주했고 인종 차별과 살해 위협과 굶주림, 아내와 가족의 비참한 최후를 삼키며 만난 아름다운 여성 뮤리엘과 혼인을 올리고 살았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지.

 

나는 사실 그래서 그의 가족을 모두 죽인 조선의, 대한제국의 이 공사관을 지날 때마다 서재필 선생을 떠올렸었다. 그에게 이 건물이 어떻게 보였을까? 서재필은 오늘날의 외무고시에 해당하는 병과에 수석 합격하였고 병과에 일 년 선배이지만 오늘날로 치면 연수원 동기인 이완용은 그의 가족을 죽인 내각의 주미 대리공사로 바로 이곳 대한제국 공사관에 파견되어 있으면서 그것이 서재필 선생에게 얼마나 분노하고 통탄할 만한 상황이었을지, 그 어떤 이야기에도 나타나지도 등장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공화정이 누구와 무엇으로부터 단절했기 때문에 성취된 것인지 우리는 잘 모른다. 서재필이 없었다면 이승만도 없었고, 근대적 독립 국가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상상할 수도 없던 시절, 그러한 나라와 그 정의에 대해 가장 적나라한 자기 삶의 비명과 헌신으로 증거해 주는 이는 나에게 필립 제이슨이다. 그가 뮤리엘과 결혼식을 올린 장소, <독립신문>을 발행하기 전에 가족 비자 발급 때문에 두 달 동안 머물러 거주해야 했던 바로 이곳 공사관.

 

일제 시대에 만들어진, 오늘날의 말로 엽서에 ‘합성’해서 그려넣은 ‘태극기’도 있었다. 독립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는, 일제가 아닌 예수님의 복음으로 세울 나라는 고향 잃고, 나라 잃고, 조국의 땅을 떠나 망향과 뼈가 접지른 전치 속에서 가장 뜨겁고 절실하게 자신의 조국을 갈구하던 이들이 상상하고 꿈꾸고 그려넣어 불어넣고 싶은 독립이라는 꿈이었다.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하나도 없었다. ‘한국’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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