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추구권과 행복의 조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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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성 한국교원대학교 명예 교수

 

-행복 추구권 이전의 행복은 덕성스러운 삶, 그후 행복은 내밀한 심리상태를 의미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우리는 자제력을 키우고 북돋는 문화를 잃어 버려

-자제력은 행복을 누리는 최소한의,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솜씨, 그만큼 절실해

 

 

2. 행복의 조건

 

누구나 자신을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는 재산권이 성립되자 모두 행복 추구권을 누리게 되었다. 행복 추구권을 누리기 이전과 이후의 행복은 개념 자체가 달라지게 되었다. 행복 추구권을 누리기 이전에는 행복이란 어떤 덕성스러운 삶을 의미했고, 덕성이란 실천적인 삶에서 확인될 수 있는 어떤 탁월성을 의미했다. 그러나 행복 추구권을 누구나 누리게 되자 행복은 덕성스러운 삶과는 독립된 어떤 내밀한 심리 상태를 의미하게 되었다.

 

덕성스러운 삶이란, 유교식으로 말한다면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덕성을 갖추고 실천되는 삶을 말한다. 사람이 착하고, 의롭고, 예의 바르고, 지혜롭고, 믿음성이 있으면 덕성스러운 것이고, 그런 덕성을 갖춘 삶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라고 보았다. 플라톤은 4주덕으로 지혜, 용기, 절제, 정의를 꼽았다. 지혜는 지배자의 덕목이고, 용기는 국가를 수호하는 수호자의 덕목이며, 절제는 피지배 생산 계층의 덕목으로 보았다. 정의는 모든 계층에 포함되는 덕목이었다.

 

덕성스러운 삶이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덕목을 갖춘 삶이었다. 더욱이 덕목은 계급적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유교에서는 군자의 덕목으로 인의예지신을 꼽았다. 군자란 지배자를 말한다. 인의예지신이란 지배자의 덕목을 말하는 것이고, 인의예지신이 불충분하게 실천되는 삶이 피배자의 삶이었다. 플라톤에서는 지배자 및 수호자의 덕목과 피지배자의 덕목은 서로 다른 것이었다. 지혜와 용기는 지배 계층의 덕목이었고, 피지배자의 덕목은 절제였다.

 

전근대 사회에서 돈을 버는 삶은 덕성스러운 삶이 아니었다. 돈은 다른 것을 위해서 유용할 따름이니까 수단적인 가치밖에 없다고 보았다. 덕성스러운 삶이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을 수 있는 목적적 가치가 있는 삶이다. 그런데 돈 자체가 목적적인 가치를 가질 수 없기에, 돈을 버는 삶도 목적적인 가치를 가질 수 없는 삶이었다.

 

경제적인 풍요를 행복의 제일 조건으로 삼고 돈을 벌기 위해 애쓰는 현대인의 삶은 전근대인의 시각으로는 강제된 삶에 불과하고 행복해질 수 없는 삶으로 치부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 경험을 보면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서열에서 알 수 있듯이, 돈을 버는 상인의 삶은 최하위의 삶이었다.

 

이제 행복은 내밀하게 향유하는 게 되었고, 내밀한 삶의 영역이 지켜지려면 남에게 간섭받지 않는 경제적 독립이 제일의 필요조건이 되었다.

 

그렇지만 근대 사회에서 행복 추구권을 누리게 되자,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행복의 개념이 달라졌다. 전근대인들의 덕성스런 삶이란 신분적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한 세계에서 누구나 행복 추구권을 누리게 되자, 신분적 특성을 반영하는 덕목은 행복한 삶의 목록에서 사라져 버렸다. 현대인의 행복이란 이제 실천적 덕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내면적인 심리 상태에 존재하게 되었다.

 

행복은 이제 남에게 과시되는 것이 아니라, 내밀하게 향유되는 것이 되었다. 내밀한 삶의 영역이 지켜지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남에게 간섭받지 않는 것, 결국 경제적 독립이 제일의 필요조건이 되었다.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면 누구엔가에 기대야 생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현대인들은 경제적인 풍요가 행복의 제일 필요조건으로 삼게 된 것이다.

 

행복이 어떤 내면적인 심리 상태일지라도 그런 행복을 누리려면 솜씨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행복의 필요조건인 경제적 풍요를 얻었다고 해서 행복을 곧바로 누리는 것은 아니다. 행복한 심리 상태에 도달하려면 삶의 솜씨가 필요하다. 행복의 충분조건이라면 삶의 솜씨를 갖추는 것이리라. 경제적 안정과 더불어 삶의 솜씨를 갖추어야 우리는 행복을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행복한 삶의 솜씨를 갖추려면 근대인들의 행복관을 다시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욕망에 관한 부분이다. 현대 사회는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고 자원은 유한하다’는 전제로 운영되고 있다. 인간의 욕망이 증폭되고 있는 시대이다. TV나 핸드폰을 보면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제품들이 쏟아져 나와 우리의 욕망을 부추기고 있다. 어제의 욕망이 채워지면 새로운 욕망이 태어나서 우리는 끊임없이 욕망의 사슬에 묶이게 된다.

 

욕망의 사슬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욕망을 채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욕망을 끊어 버리는 것이다. 무한한 욕망을 채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한한 욕망을 유한한 자원으로 어떻게 충족시키겠는가? 그렇다고 욕망을 끊어 버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생명을 끊지 않고 욕망을 끊을 수는 없다. 욕망은 삶의 원동력이다.

 

비이성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욕망도 ‘어떤 방식으로든 이성에 참여하고 있다.’ 욕망이 이성에 설득되면 자제력이 생기고, 욕망이 이성에 저항하면 자제력을 잃는다. 우리는 욕망을 이성적으로 잘 다스리는 사람을 자제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자제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자제력을 키우려면 욕망을 이성적으로 다스리는 좋은 습관을 길러야 한다. 습관화가 되지 않으면 자제력은 쉽게 잃게 된다.

 

자제력은 삶의 솜씨 가운데 가장 기초적인 솜씨이다. 자제력만 갖춘다면 역사 이래 경제적으로 가장 안락한 현대 생활에서 못 누릴 것이 없을 것이다. 욕망 충족의 수단이 태부족이었던 옛날에 발휘해야 했던 자제력이란 살인적인 덕목이었겠지만, 현대와 같은 풍요의 시대에 발휘할 자제력이란 누구나 갖출 수 있는 합리적인 덕목일 것이다. 가장 기초적인 솜씨인 자제력을 갖추지 못해서 현대와 같은 풍요의 시대에 행복을 못 누린다면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도 어처구니없는 일이 우리 사회에서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요즈음 한 아이만 낳는 핵가족이 대부분이다. 여러 형제가 있을 때는 서로 부딪치면서 자제력을 키우지만, 형제 없이 홀로 자라는 외톨이는 자제력을 키울 기회가 거의 없다. 부모가 자제력을 키워 줘야 하는데, 요즈음 외톨이 자식을 둔 부모는 잘해 주려고 애쓰다 보니 아이의 자제력보다는 욕구 충동만 키워 주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학교에서 학생들의 자제력을 키워 주지도 않는다. 교육 과정이 너무 지적 훈련에 집중하여 왔기 때문에 학교에서 좋은 습관을 키워 주는 교육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더구나 언제부터인가 학생 인권 조례를 제정하면서부터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대드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고, 학생에게 잔소리를 하면 부모로부터 항의를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학교는 이제 자제력을 키워주기보다는 욕구 충족을 부추기는 곳이 되고 말았다. 더구나 학생들에게 저항 정신을 부추기고, 자기 이익을 관철시키는 것을 민주적인 정치 과정으로 교육하기까지 한다.

 

우리는 이제 우리 사회가 왜 불행한 사람들로 넘쳐나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행복 추구권을 갖게 되었고, 경제적 풍요도 누리게 되었지만, 욕망을 다스릴 수 있는 자제력을 도외시해 왔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우리는 자제력을 키우고 북돋는 문화를 잃어 버렸다. 자제력은 행복을 누리는 데 최소한의 솜씨이고,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솜씨이다. 그만큼 절실한 것이다. 행복을 추구하거나 행복을 교육할 때 주목해야 할 것이다.

 

<리스트>

행복 추구권과 행복의 조건(1)

행복 추구권과 행복의 조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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