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주의 아닌 개인 그린 영화 ‘마틴 에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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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주현

 

-계급 프리즘으로 보면 “자본주의 사회주의 모두 거부한 개인주의자 이야기”

-주인공은 독학으로 스스로 성장하여 마침내 ‘자신’이라는 하나의 세계 만나

-크게 성공하지만, 가슴과 영혼이 텅 빈 듯 자포자기하고 세상에 냉소적으로

 

 

1
아이피티비(IPTV) 영화에서 <마틴 에덴> 소개 장면을 봤다. 패널 두 명이 영화에 대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방식이다. <마틴 에덴>은 예전에 보았고, 그때 아주 인상이 남아 한 번 더 봐야겠다고 찜했던 영화다.

 

그 패널은 영화를 어떻게 보았는지 궁금해서 화면 돌기를 멈췄다. 배에서 막노동하며 하루 벌어 먹고살던 주인공 청년이 책을 접하게 되어 세상과 자신을 넓고 깊이 보게 되는 계기가 된 어느 여성에게 반하는 장면을 두 패널은 인간, 즉 주인공의 계급 상승 욕망을 드러낸 것이라는 등 전반적으로 계급 갈등의 관점으로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그들은 영화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두 이념을 모두 거부한 “개인주의자 이야기”라는 식으로 마무리하는데, 계급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보면 충분히 나올 법한 결론이다.

 

영화가 ‘개인’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가 보아도 부인할 수 없이 명징하다. 첫 화면에서 주인공의 독백이 그러하고, 중반부 노동자 집회에서 노동권에 대한 어느 노동자의 연설도 그러하다. 그러나 내 관점으로는 주인공의 개인주의는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거부한 제3의 또 다른 이념이 아니라 현실과 이념 따위가 놓치고 있는 ‘개인’을 강조하는 것일 뿐이다.

 

주인공이 하층 노동자이고 그가 ‘개인’으로 성장하는 데 자극을 준 사람이 좋은 집안의 자녀라는 설정이 마치 계급적인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먹고 사는 일에 급급해서 식욕 성욕 수면욕 같은 기본 욕구 충족 차원 이상의 것을 알지 못하던 일차원적 인간이 자기 내면에 눈을 돌리면서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리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기도 하다.

 

부유한 여성을 상대로 설정한 것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계급 차이나 갈등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 시작해 인간으로서 개개인의 영적 정신적 잠재력을 자각하려면 일단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일에서 어느 정도 안정적인 환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그 여성에게 한 눈에 반한다. “당신처럼 말하고 당신처럼 생각하고 싶어요.” 주인공이 여성에게 반하는 걸 표현하는 장면은 그저 이성적 끌림이 아니라 주인공이 정신적인 또는 영적인 무언가 같은 추상성에 눈뜨는 모습이다. 꽃이나 자연 또는 아름다운 예술품에 끌리는 건 “아름다운 것을 보았을 때 인간은 물질보다 정신적, 영적 가치를 추구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이것이 진리에 대한 갈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패널은 이런 태도를 주인공의 계급 상승 욕망이라고 보았지만, 주인공은 그녀로 인해 어떤 내적 또는 영적 자극을 받은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독학하면서 스스로 성장한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 자신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만난다.

 

그가 여성에게 당신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싶다면서 자기를 가르쳐 달라고 할 때 그녀는 당신에게 필요한 건 기초적인 제도 교육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교육처럼 중요한 문제라면 가족이 도움을 줄 거라면서 거절한다. 패널들은 이 대목에서 역시 “상층인 여성이 하층의 삶을 모르고 나이브하게만 생각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가 제도 교육을 받지 못하는 건 고등 교육 기관의 면접에서 떨어져서다. 면접관 역시 그에게 초등 교육부터 받으라고 권하는데도 그는 거부한다. 그는 계속해서 독학하면서 스스로 성장한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 자신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만난다. “지금 나는 마치 나 자신이 하나의 세계관이 된 것 같아요.” 감독은 스스로 하나의 완성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개인’을 표현한 것이다.

 

주인공과 그 여성이 카페에 갔을 때는 종업원으로 일하는 여성을 주인공이 무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상류층 여성을 만나기 직전, 주인공이 한낱 잡역부에 지나지 않던 때 길에서 만났던 여자다. 그와 함께 밤을 보냈을 정도의 사이인데도, 모르는 척하는 주인공이 너무한다고 한 네티즌 의견을 소개하면서 패널 또한 계급 의식 관점에서 감상한다.

 

“(그녀하고는) 말이 통하지 않을 거예요. 문법을 모르거든요.” 함께 간 상류층 여성에게 종업원 여자를 설명하는 주인공은 언뜻 ‘난 이제 너랑 다른 계층의 사람이야’라며 그를 무시하는 듯하지만, 그건 자기가 더이상 이전처럼 일차원적 쾌락이나 욕구 만족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은유한다. 문법, 즉 말하는 방식이란 곧 생각하는 방식과 방법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조합이 파업을 선언했다. 나는 파업에는 찬성하지만 조합은 반대한다. 노동자는 일하려면 세금뿐만 아니라 조합 운영비도 내야 한다. 이건 부당하다. 노동권이 개인 권리가 아니라 조합 권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조합은 노동권을 팔고 노동자는 그걸 사야 한다. 사회주의자는 혁명을 통해 모두 평등하게 권리 누리길 꿈꾼다. 하지만 그 ‘모두’란 누구인가? 결국 조합이란 노동자 집단이다. 노동자 개개인이 아니라. 그 주장에 개인은 어디에 있는가?”

 

패널들은 이 영화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를 거부한 개인주의자 이야기’라고 하지만, 사실 영화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견해는 비교적 명확한 반면, 자본주의에 대한 거부는 모호하다. 사회주의와 달리 자본주의는 이념이 아니라 현실이고, 주인공이 자기 배경이었던 가난한 현실을 고민하고 고뇌하는 모습 때문에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건 가난에 대한 거부일 뿐 아닐까? 가난이 자본주의만의 산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후반부에서 주인공은 작가로 대성공하지만 그 여성과 이루어지지는 못하고, 종업원이었던 여성과 함께 지내는 것으로 기억한다. 뒷부분 이야기는 다시 봐야 할 듯.

 

2
영화 <마틴 에덴>은 그저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정도가 아니라 명확하게 반대하는 개인주의자 이야기이다. 나아가 사회주의와 타협하는 자유주의의 비겁함과 위선, 가짜 개인주의가 한 ‘개인’을 얼마나 절망하게 만드는지 보여준다.

 

사회주의 노동자 모임에서 사회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난 주인공은 그의 뮤즈인 엘레나 가족과 식사하는 자리에서는 자칭 자유주의자라는 상류층의 위선과 비겁한 무지를 또 다시 뼈 때린다. 엘레나와 그 가족에게 사회주의자로 오해 받자 이렇게 반박한다.

 

“자유시장이 최고 시스템이라 생각하고 능력주의와 경쟁을 장려하면서 그걸 약화하는 법에 찬성하시는 거네요. 무역을 규제하고 산업체 간 합병에 제한을 두고 국가가 공공 산업을 장려하고 지원하도록 허락하셨잖아요.”

 

“사회주의에 물든 건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란 뜻이다. 사회주의적 조치를 취하고 있지 않은가? 난 사회주의에 반대한다. 여러분이 대변하는 민주주의도 반대한다.”

 

“상업을 장려하면서 부자가 되는 데만 관심 두는 것, 그게 자유주의라지만 사실 자유주의는 없다. 애초에 존재한 적도 없다. 세상은 개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금발 짐승인 귀족의 것이고, 타협이란 걸 모르는 그 짐승들이 사회주의를 겁내는 사회주의자이자 자칭 개인주의자인 당신들을 잡아먹는 것이다.”

 

이 자리를 계기로 그는 엘레나와 헤어지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그를 작가로 응원하던 사회주의 운동가 친구 루스를 잃는다. 이후 그는 크게 성공하지만, 가슴과 영혼이 텅 빈 것처럼 자포자기하고 세상에 냉소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시종일관 자본주의를 비아냥거리는 것이다.

 

그의 이런 태도는 자살한 친구 루스로 대변되는 사회주의의 무쓸모도 영향이 있지만, 결정적인 건 엘레나라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는 원래부터 반대했지만, 엘레나로 은유된 ‘개인’과 ‘자유’는 그를 그 자신으로 충만하게 만든 정신적 지주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시 첫 장면에서도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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