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제2차 영일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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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일본이 먼저 강화 요청. 주미일본공사, T.루스벨트 대통령 만나 강화 주선 부탁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 아시아 순방 외교 사절단이 일본·필리핀·중국·조선 순방

“미국은 영일 동맹의 일부. 공식 조약 없어도 미국이 우리의 동맹임을 상기해야”

 

 

1904년 2월 8일에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러일전쟁은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의 싸움인 ‘0차 세계대전’이었다. 영국을 대리하여 일본이 러시아와 벌인 그레이트 게임이었다.

 

1905년 5월 27일에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끈 일본연합 함대가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발트함대를 궤멸시키자 전 세계는 경악했다. 레닌은 “이렇게 무참하게 패배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술회했다.

 

하지만 승자인 일본도 전쟁을 계속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일본은 전쟁을 수행할 능력과 재정이 고갈되었다. 러시아도 1905년 1월 22일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반정부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어 짜르 체제가 위기에 빠졌다.

 

먼저 강화를 요청한 쪽은 일본이었다. 5월 31일에 주미일본공사 다카히라는 시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재임:1901-1909)을 만나 강화 주선을 부탁했다. 이러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자기가 제안한 것처럼 중재에 나섰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 뉴햄프셔주에 있는 군항 도시 포츠머스에서 회담을 주선했다. 8월 9일에 포츠머스 강화회담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회담의 협상력을 높이기 위하여 7월 9일에 사할린 상륙작전을 개시하여 8월 1일에 사할린을 점령했다.

 

한편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아시아 순방 외교 사절단을 파견했다. 7월 5일에 육군장관 태프트를 비롯하여 상원의원 7명, 하원의원 23명 그리고 21세의 대통령 딸 앨리스와 다수의 군인 및 민간인들이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했다. 순방지는 하와이, 일본, 필리핀, 중국, 그리고 대한제국이었다.

 

T.루스벨트 대통령은 뉴햄프셔주에 있는 군항 도시 포츠머스에서 러-일 강화회담을 주선했다.

 

7월 25일 요코하마 항구에 도착한 태프트는 7월 27일에 도쿄에서 가쓰라 수상과 밀약을 맺었다. 소위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요지는 미국은 필리핀의 지배를 보장받고 일본은 한국의 지배권을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러일은 각자 이익을 확인한 것이다(밀약은 1924년에야 공개되었으니 고종이 알 리 없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체결 7일 후인 8월 4일에 목사 윤병구와 이승만은 미국 사가모어 힐 별장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다. 독립협회 활동을 한 이승만은 1898년 12월에 반역죄로 한성 감옥에 투옥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904년 러일전쟁 발발 후 석방되어 11월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윤병구와 이승만은 하와이 교민 8천 명을 대표하여 한국의 주권과 독립보전에 대한 희망을 담은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 자리에서 루스벨트는 공식적 창구를 거치기 전에는 검토할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일본이 한국 외교의 공식적 창구를 지배하고 있음을 알고도 교묘하게 답변한 것이다.

 

순진한 이승만 일행은 워싱턴의 한국공사관을 찾아갔다. 하지만 대리공사 김윤정은 본국 정부의 훈령이 없이는 청원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하소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하였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한편 8월 12일에 일본은 영국과 ‘제2차 영·일 동맹’을 체결했다. 1905년 3월 24일에 영국은 일본에 1902년 1월에 체결된 제1차 영일동맹 개정 필요성을 제기했다. 3월 27일에 일본도 찬성했다. 영국은 5월 17일 “현재의 방어동맹을 공수동맹으로 강화하고 동맹의 범위를 인도까지 확장하자.”고 제안했다. 당시는 러시아 발트 함대가 아시아로 오고 있는 중이어서 영국은 러시아가 인도를 침공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었다.

 

5월 26일에 일본 측 안이 영국에 전달되었다. 여기에는 제1차 동맹의 “청국과 함께 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 조항”은 삭제되고 그 대신 “영국은 일본의 한국에서의 정치상⋅군사상⋅경제상 특별한 이익의 옹호·증진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도⋅관리 감독⋅보호 조치를 취할 권리를 승인한다.”는 조항이 신설되었다. (최문형 지음, 러일전쟁과 일본의 한국 병합, P 309-313)

 

10월 4일 자 일본 『고쿠민(國民)신문』은 “영일동맹은 사실상 영–미-일 동맹”이라고 보도했다.

 

“영국이 우리 동맹이 됐을 때 미국은 그 동맹의 일부가 됐다. 국가적 상황으로 인해 공개적으로 연합을 주장하지 못할 뿐 일본은 공식적인 조약이 없더라도 미국이 우리와 동맹임을 상기해야 한다.”

 

그런데 줄곧 러시아에 의존했던 고종은 이제는 ‘맏형의 나라’ 미국이 ‘동생의 나라’ 대한제국을 살려 줄 것으로 굳게 믿고 아시아 순방 외교사절단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종은 1882년 5월에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조의 ‘거중조정’ 조항에 의거 미국이 ‘중재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고 이에 의거하여 일본을 견제해줄 것으로 확신했다.

 

하지만 고종은 영토확장에 혈안인 제국(帝國)의 생리를 너무나 몰랐다. 영국·프랑스를 비롯한 열강들은 식민지 쟁탈만 할 뿐 약소국 보호는 외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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