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6) 일본이 승리한 이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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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첩보전의 선봉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일본공사관 무관이었던 아카시 모토지로

-가폰 신부, 레닌, 크로포트킨, 플레하노프, 소설가 막심 고리키 등 광범위한 접촉

-“아카시는 홀로 만주의 일본군 20만 명에 필적하는 전과를 올렸다”는 평가까지

 

 

러일전쟁의 승리요인 중 하나는 일본의 첩보전이었다. 일본은 불안한 러시아 정국의 틈새를 파고들어 혼란과 반정부 시위 공작(工作)을 한 것이다. 첩보전의 선봉은 1902년 8월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일본공사관 육군 무관으로 근무한 아카시 모토지로(1864∽1919)였다. 그는 러시아 일본 공사관이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거처를 옮긴 후 ‘러시아 내란 유도 공작’에 착수했다.

 

아카시는 일본 정부로부터 100만 엔의 공작금을 받았다. 이 돈은 일본 세입 2억5천만 엔의 0.4%에 해당하는, 현 시가로 5,400억 원이나 되는 거액이었다. 아카시는 제정 러시아 안팎의 거물 혁명가, 좌익 운동가, 불평분자 등과 광범위하게 접촉했고 그들에게 아낌없이 거금을 뿌렸다.

 

그가 접촉한 인물들은 가폰 러시아 정교회 신부, 혁명가 레닌, 공산주의 사상가 크로포트킨과 플레하노프, 폴란드 민족주의자 피우스트스키, 핀란드 독립운동가 실리아쿠스, 소설가 막심 고리키, 그루지아(조지아)·라트비아·벨라루시 등 러시아의 영향권에 있는 나라의 민족주의 지도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짜르의 군대가 인민을 학살한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1,000명 이상의 노동자가 죽었고, 4천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1905년 1월 1일에 뤼순이 함락되었다. 이로부터 20일이 지난 1월 22일 일요일에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궁전광장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났다. 이 날 오전에 가폰 신부는 니콜라이 2세에게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궁전을 향했다. 청원서에는 해고자 복직 요구를 사업주가 거절했다는 내용과 함께 8시간 노동제, 노동권 보장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오후 2시에 궁전광장에 20만 명이 넘은 노동자와 가족들이 모였다. 이 대열 앞에는 ‘병사여, 인민을 쏘지 말라’는 플래카드가 들려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군대는 대열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가했고, 기병대가 돌진하여 칼을 휘둘렀다. 1,000명 이상의 노동자가 죽었고, 4천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이 잔혹한 학살 소식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국민들을 분노케 했다. 그 결과 66개 도시의 노동자들이 항의 표시로 작업을 중단했다. 1월 한 달 동안 동맹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는 44만 명에 이르렀다. 이 숫자는 지난 10년 동안의 파업 참가자 수보다 훨씬 많은 것이었다.

 

그런데 훗날 ‘피의 일요일 사건’과 노동자 파업에 일본이 공작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아카시가 가폰 신부에게 많은 공작금을 지원한 것이다. 아카시는 스위스에 망명한 레닌과도 친했고, 아카시의 공작금을 받은 레닌은 러시아에 잠입했다(최근에는 이를 부정하는 연구도 있다).

 

아카시의 활동이 얼마나 눈부셨는지 이토 히로부미가 “아카시 모토지로 혼자서 일본군 10개 사단의 역할을 했다.”고 칭찬할 정도였고, “아카시는 홀로 만주의 일본군 20만 명에 필적하는 전과를 올렸다.”는 평가도 있다. 이처럼 일본의 첩보전에 대한 평가는 과장된 면도 있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

 

그런데 아카시 모토지로는 한국과도 관련 있는 인물이었다. 1905년 9월에 러일전쟁이 끝나자 그는 조선통감부의 헌병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1907년 10월에 항일 의병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조선총독부 시절에는 경무 총장이 되어 1914년까지 조선의 치안을 담당했는데 그의 재임 시절에 ‘105인 사건’으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어 고통을 당했다.

 

『구름 위의 언덕』 소설을 쓴 시바 료타로는 “한마디로 아카시는 악당이었다. 조선 지사(志士)에 대한 탄압방법은 교묘하고 교활하기 그지 없었다.”고 말했다. (와다 하루키 저 · 이경희역, 러일전쟁과 대한제국, p 67)

 

한편 이성환은 전쟁 승패의 요인을 ‘근대화’라는 점에서 접근했다. 일본은 입헌군주제를 도입해 근대국가로서 체제를 갖추어 가고 있었으나, 러시아는 전근대적인 차르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체제의 차이가 두 나라 병사들의 국가와 전쟁에 대한 인식 차이를 가져오고 전쟁의 승패로 연결되었다고 보았다.

 

러일전쟁 후 한국도 지식층을 중심으로 독립협회가 주장하다 실패한 입헌군주제 도입 주장이 다시 일어났다. 하지만 고종 황제의 전제군주제 아래서는 미풍에 그쳤다.
(이성환, 러일전쟁, 2021, p166-176)

 

<게재 리스트>

(1) 해양-대륙세력 격돌한 ‘0차 세계대전’

(2) 영일 동맹과 러시아의 용암포 조차

(4) 일본이 승리한 이유#1

(5) 일본이 승리한 이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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