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동부연합을 어떻게 볼 것인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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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미리 정치학 박사, <경기동부> 저자

 

-‘외대 용인’으로 설명되지 않는 정치적 서열,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과 성남의 운동사

-1960년대 후반 ‘선입주‧후건설’ 명분으로 서울도심 철거민들을 광주대단지에 내려놓아

-서울에서 격리되고 고립된 광주대단지 사람들 ‘아기 삶아먹은 산모’ 이야기의 공포 전유

 

 

지난 9월 27일 여의도 까페 하우스에서 열린 토론회 ‘경기동부연합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발표 내용을 연재해 소개합니다. 발제자는 세 분으로, 임미리 박사는 ‘경기동부- 종북과 진보 사이, 잃어버린 우리들의 민주주의’를, 김준용 국민노조 사무총장은 ‘경기동부연합은 어떻게 민주노총의 집행부를 장악했는가’를, 민경우 미래대안행동 공동대표는 ‘풀뿌리 시민운동과 지방자치, 그리고 경기동부연합’이라는 주제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토론회는 플랫폼 ‘통합과 전환’ 준비위원회 주최로 열렸습니다. <편집자>

 

<주최측 소개문>
15년간의 민주헌정 중단과 독재의 시대는 1987년에 끝나고, 그로부터 벌써 34년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가 남긴 흔적들은 한국 사회의 이념 지형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독재에 항거한 민주화운동의 7, 80년대, 그리고 연이은 통일운동의 90년대가 남긴 흔적 가운데서도 가장 특이한 존재로서 경기동부연합이 있습니다.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이후 모두에게 왕따가 되었던 경기동부연합이 민주노총의 집행부를 장악하면서, 또 풀뿌리 시민운동과 지방자치를 통하여 부활하고 있습니다. 변두리 하층민의 조직자였던 경기동부연합은 ‘핵인싸’로 돌아오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질긴 경기동부연합의 생명력은 어디서 오는가? 오랜 시간 경기동부연합과 함께 하거나, 지켜보신 분, 그리고 깊은 애정으로 눈물 흘리며 경기동부연합을 깊이 들여다본 연구자를 초청하여 이제는 넘어서야 할 ‘87체제’의 특이한 문제로서 경기동부연합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경기동부: 종북과 진보 사이, 잃어버린 우리들의 민주주의

 

1. 서론
2. 경기동부연합의 개요
3. 광주대단지 사건과 차별·배제
4. 광주대단지 사건과 성남시 사회운동
– 두 개의 광주가 만나다
– 경기동부연합의 전설이 시작되다
5. 민노당 창당과 당권 장악
6.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사태: 세 번째 죽음과 세 번째 기억
7. 경기동부연합의 계급적, 지역적 특성
8. 그들은 어떻게 고립되어 갔는가
– 5.18, 유신의 아이들에서 주체의 아이들로
– 남한의 민주화와 북한의 경제 위기
– 적대적 진영 논리, 기억의 고착, 집단의 덫

 

1. 서론

이 연구의 특징은 주사파 출신이 아닌 연구자의 지적 소산이라는 점이다.

 

연구의 동기는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사태에서의 두 가지 폭력 즉 Δ타인에 대한 폭력 = 단상 점거 Δ자기에 대한 폭력 = 박영재 당원의 분신을 목격한 충격이었다.

 

이 연구에서 광주대단지 또는 성남에 주목한 이유는 Δ‘외대 용인’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정치적 서열관계 Δ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에서 비롯된 성남시 특유의 운동사 등이었다.

 

1970년 8월 10일 사건은 겨우 6시간 동안 일어났지만 3만~6만 명에 달하는 광주대단지 주민들이 참여하면서 정권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2. 경기동부연합 개요

 

•(범)경기동부연합의 구성/위계
혁명조직: 지하당 > 비합선전조직 > 대중조직
내부서열: 성남 > 경기동부 > 주사파
외부연대: 경기동부+광주전남+실천연대

 

3. 광주대단지 사건과 차별·배제

 

“청계천 주변의 인쇄공이었던 한 가장이 아내가 허기에 지쳐 실성해 갓난아기를 삶아먹었다고 하며 목을 매 자살했다고 하는 이장의 생생한 증언에 치를 떨었다. 직접 보고 들은 현장을 오히려 걸러서 광주대단지 르포를 꾸몄다.”(고려대 한맥 회원 조상호) 신동호, 2005, 「긴급조치9호세대 대탐험」, 『뉴스메이커』556호 3월호

 

“70년 봄에는 전염병이 번져 한 천막촌에서 3, 4구의 시신이 나갈 때도 있었다.”(홍사홍) 박기정, 1971, 「르뽀 광주대단지」, 『신동아』, 10월호

 

“바람이 세차게 불 때마다 집이 마구 흔들렸다. … 그녀는 나에게로 달려오며 ‘집, 날아 갔어요!’ 하며 목이 메었다.” 김상운, 1986, 「광주대단지 철거민들의 애환」, 『 신동아』, 3월호

 

성남시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광주대단지는 고도성장 시기 철거민 강제이주 정책의 가장 큰 희생양이면서, 1971년 박정희 정권 최초이자 최대의 도시봉기가 일어난 지역이다. 1960년대 후반 서울시는 ‘선입주‧후건설’이라는 전대미문의 도시 계획 정책을 수립하고 서울 도심의 철거민들을 트럭에 실어 광주대단지에 내려놓았다.

 

철거민들이 내려진 곳은 지금의 성남시 수정구와 중원구 일대로 수도나 전기를 비롯해 도시기반시설이 전혀 갖춰지지 않았다. 주민들은 극심한 생활고와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부모들은 몇 시간씩 걸어 서울에 일하러 나갔고 아이들은 소나무 속껍질을 벗겨 허기를 채웠다.

 

사건이 났을 때 대단지 주민들의 공간적, 사회적 격리와 그에 따른 생활고를 짐작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일은 ‘산모가 갓난아기를 삶아먹었다’는 소문이었다. 서울로부터 격리되고 세상으로부터 고립돼 갈수록 먹고살기 힘들어진 광주대단지 사람들은 ‘아기를 삶아먹은 산모’ 이야기로 공포를 전유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시가 토지분양 대금의 확보를 위해 분양지 전매금지 조치를 내리고 경기도가 가옥취득세를 부과하면서 주민들의 불만에 불을 지폈다. 1970년 8월 10일 사람들이 모였다. 사건은 겨우 6시간 동안 일어났지만 3만~6만 명에 달하는 광주대단지 주민들이 참여하면서 정권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사건이 일어난 뒤 광주대단지는 시 승격이 결정됐고 일이 빠르게 진행됐다. 구호 사업이 진행됐고 생계 문제와 열악한 주거 환경 문제도 점차 좋아졌다. 그러나 사건은 장기적으로 기존의 사회적 배제를 더 심해지게 했다. 광주대단지로 이주한 일이 첫 번째 차별과 배제였다면, 8․10 사건은 두 번째 차별과 배제를 가져왔다. 정부와 사회는 광주대단지 주민들을 폭도로 여겼고 도시 전체가 빈곤과 범죄의 낙인이 찍혔다. 광주대단지 사람들은 ‘아기를 삶아먹는’ 사람들이 됐고, 폭력과 범죄와 난동을 일삼는 사람들이 됐다.

 

도시 전체에 찍힌 빈곤과 범죄의 낙인은 사건의 영향 이전에 대단지의 건설 계획 자체가 가져다 준 것이다. 광주대단지는 성남시로 승격된 뒤에도 몇 십 년 동안 저소득층에 한정된 전입전출이 이어지면서 ‘못사는 동네’, ‘우범 지역’으로 낙인찍혔다. 도시 전체가 빈민 지역의 대명사가 된 까닭은 광주대단지 개발 시기에 일괄적으로 분양지를 20평으로 구획했기 때문이다. 사건 이후 도시는 성장했지만 거주민들은 대지 20평에 건평 10평 남짓의 소형 가옥에 사는 서민들로만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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