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천대유와 ‘이반 일리치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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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미

 

-톨스토이 작품은 일단 책장 넘기면 놀라운 세계 펼쳐지고 묵직한 감동과 풍요로운 뒷맛

-판사로 시작, 평생 출세대로 달린 이반 일리치의 삶, 우리 법복귀족 모습과 정확히 일치

-화천대유 법복귀족, 화천대유 청구서 고마워해야. 기만극 끝내고 삶의 진실로 돌아오라

 

 

얼마 전 독서 토론 모임에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었다. 모이는 사람들의 주 관심사가 인류사, 환경 문제 등 거대 담론 쪽이어서 벽돌책을 주로 읽어 왔는데 소설은 처음이었다.

 

미리 선정한 책이 절판되어 급히 대타로 투입되었는데도 회원들 모두 아주 만족해 했고 심지어 고맙다고까지 한 분도 꽤 있었다. 톨스토이가 좀 그렇다. 처음에 선뜻 손이 가기에는 고리타분한 느낌이지만 일단 책장을 넘기면 놀라운 세계가 펼쳐지고 그 묵직한 감동은 풍요로운 뒷맛을 남긴다.

 

이반 일리치는 우리로 치면 고등 법원 판사로 재직하던 중 중병을 얻어 죽었다.

 

“가볍고 유쾌하고 즐거운 생활”을 삶의 품격이라고 생각해서 추구하고 누려온 생이었다. 그는 영민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지만 “불빛을 향해 날아드는 날벌레처럼 어려서부터 사교계의 최고위층 사람들에게 본능적으로 이끌려 그들의 습관이며 세상을 보는 시각을 그대로 따라 배우며 그들과 아주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간” 인생을 살아왔다.

 

그런데 좋은 집안의 아내를 맞이한 결혼, 안정적인 경제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삶은 웬일인지 공허로 굴러떨어지고 탄탄대로 출셋길로 끝없이 펼쳐질 것만 같은 미래는 어느 한 순간 죽음의 병마가 들어서면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홀로 남겨져 극심한 고통과 싸우는 죽음의 자리에서 그는 그 불가해한 고통과 죽음이 왜 왔는지,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는지 필사적으로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차마 인정할 수 없는 진실 앞에 서게 된다. 자신이 잘못 살아왔다는 것을, 그 모든 삶의 방식이 “삶도 죽음도 가려 버리는 하나의 무시무시하고 거대한 기만”이었다는 것을 그는 인정하게 된다.

 

이반 일리치는 그 누구와도 진실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가볍고 유쾌하고 즐거운 생활과 품격”을 위한 수단으로 자신이 맡은 직무와 인간관계를 대하면서 잘 살아왔다. 그는 잘 해내왔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그는 지금까지 잘 해온 것들이 자신을 삶의 기쁨과 행복에서 차단하게 한 거짓 기만극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가볍고 유쾌하고 즐거운 생활을 위해서 삶의 의미와 기쁨을 내버리고 살아온 인생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톨스토이는 인간의 정신세계에 천착했지, 그 정신세계의 외피를 이루는 사회의 어둠과 구조적 비리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 책도 주인공 이반 일리치의 개인사와 그에 얽힌 마음의 행로에 국한하여 그리고 있다. 하지만 삶의 기만극은 한 사람의 가정사와 마음에서만 한정되어서 벌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만극은 반드시 외부로 팽창되어가며 다른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과 사회질서가 작동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고받아 같은 구조 다른 스케일로 복제되게 된다.

 

기만극을 끝내고 삶의 진실로 돌아오라. 

 

요즘 온 나라를 들썩이게 하는 화천대유, 천화동인의 기만극이 바로 그것이다. 우수한 성적으로 법률 학교를 졸업하고 판사로 인생을 시작하여 평생을 사회의 책임 있는 위치에서 무난한 출세대로를 달려온 이반 일리치의 삶은 우리 사회 법복 귀족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판결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 만큼 무거운 의미를 가지는지 고민 없이 쉽게 쉽게 판결문을 써 냈을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틀림없이 무난한 인간관계를 위해 주변에 횡행하는 재판 비리에 눈감고 좋게 좋게 지냈을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쉽사리 재판 거래를 하는 탐욕을 내비치지 않았겠지만 절대 탄로나지 않을 확신만 있다면 큰돈의 유혹에는 한 번쯤 넘어갔을 것이다.

 

물론 그도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주위를 거스르면서까지 판결의 정의와 무게를 고집하기에는 생활의 가벼움과 유쾌함을 버리기 힘들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이반 일리치는 가볍고 유쾌하고 즐거운 생활을 위해 사회에 대한 책임감과 동시대인에 대한 유대감에는 등을 돌리고 살아왔다. 이반 일리치는 돈과 명예와 권력을 바라보고 살아왔지 삶의 기쁨과 내적 진실과 인간관계의 진실에는 눈감고 살아왔다.

 

기만극을 정확히 연기한 삶이었다.

 

대장동 개발 비리는 우리 사회 출세 지향적인 인간들이 어떻게 거대한 기만극을 만들고 그 기만극으로 사회를 병들게 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연루된 법복 귀족들이 얼마나 가볍고 유쾌하고 즐거운 생활을 살아왔는지 보여 주고 있다. 재판의 정의에 한번 눈을 감은 댓가로 수십억 원의 이권이 왔다갔다 한다. 이름 한 번 올리면 월 수입 기천만 원이 보장된다.

 

하지만 ‘생활과 삶’만큼 가장 비슷한 지점을 포착하면서도 거리가 먼 두 단어가 또 있을까. 가볍고 유쾌하고 즐거운 생활을 위해서 미루고 닫아버린 그 모든 것들이 삶의 차원으로 오면 무거운 청구서로 변해 차곡차곡 쌓여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반 일리치들에게도 희망은 있다.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를 통해 이 거대한 기만극을 끝장내고 진정한 삶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보여 준다.

 

먼저 거대한 기만극임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마음을 여는 것이다. 그리고 고백하는 것이다. “용서해 줘(쁘로스찌)”라고.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서야 인생의 비밀을 알아챈 이반 일리치는 “끝난 건 죽음이야, 이제 더 이상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라는 생각을 끝으로 기만극에 갇혀 있던 자신을 다 열고 온 몸을 쭉 뻗고 숨을 거두었다. 그는 죽음 대신 빛을 보았다.

 

화천대유에 연루된 법복 귀족들은 죽음 대신에 화천대유로 청구서가 날아온 것을 고맙게 생각할 일이다. 기만극을 끝내고 삶의 진실로 돌아올 기회가 왔다. 다행히 최종 심급인 죽음보다 한 발 앞서 화천대유 사태가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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