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1세기 전 대한제국 망국의 풍경(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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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덕수궁 이태왕, 새벽 3시 취침 오전 10시 기상. 조상님들 제사. 밤에는 궁녀들 찾아

-복녕당 양씨가 덕혜옹주 출산. 고종 61세, 양씨 31세. 복녕당 찾는 것이 주요 일과

-‘두 나인 시켜 독약 탄 식혜로 고종 독살했는데, 두 나인도 입을 막기 위해 살해했다’

 

 

고종, 3.1 운동 그리고 대한민국

 

1910년 8월 29일에 나라가 망하자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 전하가 되어 덕수궁에서 생활했다. 그의 일상은 1907년에 퇴위한 때와 비슷했다. 새벽 3시에 잠자리에 들어 오전 10시경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오후에는 찾아오는 사람을 만나거나 선원전의 조상님들을 찾아 제사를 지냈다. 밤에는 산책을 하거나 궁녀들을 찾아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영친왕의 생모 엄귀비가 1911년 7월 20일에 별세했다. 사인(死因)은 장티푸스였다. 새옹지마랄까? 1912년 5월에 복녕당 양씨가 덕혜옹주를 출산했다. 고종은 61세, 양씨는 31세였다. 이러자 고종은 사는 맛이 났다. 복녕당으로 자주 가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1913년에 고종은 회갑연을 성대하게 열었다. 원래는 1912년이었으나 그 해에 메이지 일본 천황이 죽어 잔치를 연기한 것이다. 회갑연에는 광교와 다동기생조합 소속 예기(藝妓)들이 잔치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박종인 지음, 매국노 고종, p 348)

 

1914년 7월에는 광화당 이씨 소생인 이육이 태어났다. 1915년 8월에는 보현당 정씨 소생인 이우가 태어났다. 늦게 두 아들을 얻은 고종은 기뻤다. 그런데 1916년 1월에 이육이 죽었고 7월에는 이우도 죽었다. 이 당시에 다섯 살 덕혜옹주가 유치원에 입학했다. 유치원은 덕수궁 준명당을 개조했다.

 

나라를 팔아넘긴 대가로 잘먹고 잘살던 고종이 죽자 독살당했다는 소문에 선동된 백성들이 몰려나와 항의 시위에 나섰다.

 

이후 고종은 덕혜옹주를 사랑하여 함녕전에서 같이 지냈다. 덕혜옹주의 재롱을 보며 하루하루를 지내던 고종은 1919년 1월 21일에 식혜를 먹고 갑자기 승하했다. 나이 67세였다.

 

“묘시(卯時 오전 6시)에 태왕 전하가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하였다.” (순종 실록부록 1919년 1월 21일)

 

그런데 1월 20일의 숙직이 이완용이었고, 일제는 고종의 사망 사실을 하루 동안 숨겼다가 ‘신문 호외’라는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발표했다. 일제가 발표한 사인은 뇌일혈이었다. 이러자 독살설이 널리 유포되었다. 가장 유력하게 퍼진 설은 ‘이완용 등이 두 나인에게 독약 탄 식혜를 올려 고종을 독살했는데, 그 두 나인도 입을 막기 위해 살해했다.’는 설이었다. (이덕일 지음, 근대를 말하다, p 230-231)

 

이에 분노한 국민들은 고종 인산일(因山日)인 3월 1일에 독립 만세 운동을 벌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 대표 33명 중 29명이 참석하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2시 반에는 탑골공원에서 5천 명의 학생과 시민이 선언식을 하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같은 시각에 평양과 의주·원산 등지에서도 3.1 운동이 일어났다. 3.1운동은 3월 10일을 전후해서는 전국적으로 확산됐고, 3월 20일부터 4월 10일까지 20일간 절정을 이루었으며 8월까지도 계속되었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임시정부가 국내외 각 지역에서 최소한 6개 이상 조직되었다. 가장 먼저 생긴 곳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였다. 3월 17일에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는 대통령에 손병희,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추대했다. 상해에서도 4월 10일에 프랑스 조계에서 임시의정원 대표 29명이 모여 밤을 세웠는데 4월 11일 오전 10시에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를 국가체제로 삼는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채택하였고, 국무총리에 이승만,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총장에 김규식등 6명을 임명했다.

 

4월 23일엔 서울 봉춘관에서 13도를 대표하는 24명이 모여 임시정부 선포문과 한성정부 명단을 발표했다. 집정관 총재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등이었다.

 

3개의 임시정부 외에도 조선민국 임시정부(서울, 4월 10일), 신한민국 정부(평안도, 4월17일)등도 등장했지만 이러한 임시정부는 문서로만 알려진 이른바 “전단 정부”였다.

 

나중에 연해주와 한성 임시정부는 상해 임시정부와 통합하였고, 통합된 임시정부는 상해에 두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상해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다. 이는 1899년에 선포된 「대한국 국제」에서 규정한 ‘전제 군주국’에서 벗어나 국민이 주인이 되는 ‘대한민국’으로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한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시행 1988. 2. 25.] [헌법 제10호, 1987. 10. 29., 전부개정]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라고 되어 있다.

 

헌법 제1조는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이다.

 

요컨대, 대한민국의 원년은 1919년이었다. (김태웅 · 김대호 지음, 한국 근대사를 꿰뚫는 질문 29, p 567-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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